연평도 포격 이후 장사정포 위협 재평가 목소리…한국군만 ‘모르쇠’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가 북한 장사정포 시뮬레이션 보고서(작은 사진)를 통해 지목한 주요 갱도진지 위치(노란색 사각형). 휴전선을 따라 서부전선에 집중배치돼 있다.
2월 어느 밤, 개성직할시 판문군 일대에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 갱도진지가 하나 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다. 구름과 안개가 잔뜩 낀 날씨는 전방 초소와 항공정찰자산의 특이 동향 감시를 어렵게 만들고, 북한 측 전방 포병부대 통신망의 광케이블 유선화 작업으로 정보당국 역시 감청을 통해 이상 징후를 감지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새벽 3시. 240mm 방사포와 170mm 자주포가 서울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한다. 변변한 조기경보 없이 떨어져 내리는 포탄에 놀란 시민들은 지하철역과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뛰어들지만, 곳곳에서 치솟는 불길과 연기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만들어낸다. 전방의 K-9 자주포와 대구에서 출격한 F-15K가 이내 격파사격에 돌입하지만, 이미 잃은 인명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 1994년 3월 박양수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의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장사정포에 대한 공포다. 수도권을 겨누고 있다는 북한 포병 전력의 그림자는 그사이 한 번도 흐려지는 법이 없었다. 이들이 유사시 핵무기에 준하는 피해를 안길 것이라는 두려움은 그간 한국군의 군사 대비 태세와 전력구조 상당 부분을 지배한 최대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방백서가 지목한 핵심 위협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1월 6일 국방부가 발간한 ‘2014 국방백서’는 핵이나 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함께 장사정포 전력을 북한이 공들여 강화하고 있는 주요 전력의 하나로 거론했다. 170mm 자주포와 240mm 방사포의 수도권 기습 대량사격 시나리오 또한 백서가 기술한 핵심 위협 중 하나. 육군과 공군 무기체계를 동원해 조기에 이들을 격파하는 대화력전(對火力戰)을 한국군의 주된 임무로 꼽고 이를 위한 전력 증강을 2020년까지 완료하겠다는 결의도 백서에는 담겨 있다.
2014년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를 통해 결정된 주한미군 210여단 포병전력의 한강 이북 잔류의 근거 또한 ‘심화된 북한 장사정포 위협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을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던 2004년 당시 군 당국은 “한국군이 북한 장사정포 부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나면 후방으로 물러나 있던 주한미군 전력이 임무를 교대해 남은 북측 전력을 궤멸할 수 있으므로 (최종 승리에) 한층 더 유리하다”고 설명한 바 있지만, 10년 뒤 왜 말이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요컨대 장사정포 위협은 주요 군사정책 결정 과정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활용돼온 ‘묻지 마 근거’였던 셈이다.
이러한 군 당국의 판단은 평양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공언하는 현재 시점에도 과연 충분히 합리적일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장사정포가 우리 측에 입힐 예상 피해 규모의 편차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군 당국이 제시했던 자료와 미국 측 전문가들이 분석한 데이터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북한 무기체계 개발에 오랜 기간 관여했던 탈북자들의 시각도 자못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장사정포가 실제로 그만큼 두려운 위협이냐’에 대해 재검토해봐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 셈이다.
북측이 서부전선 일대에 집중 배치한 장사정포는 크게 두 종류, 170mm 자주포 150여 문과 240mm 방사포 200여 문이다. 자주포란 궤도차량에 얹혀 있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포를 말하고, 방사포는 포신 여러 개를 묶어 동시에 발사할 수 있게 만든 한국군의 다연장포와 같은 개념이다.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갱도진지에 숨은 이들 포의 사거리는 각각 40~60km에 달한다.
뚜껑을 열고 보니
2014년 4월 25일 실시된 북한군 포 사격 훈련에 등장한 170mm 자주포. 이틀 뒤 ‘노동신문’이 게재한 사진이다.
차이를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은 이들 포탄의 살상력이다. 먼저 미국 측 전문가들은 북한이 장사정포 공격을 수도권의 민간인 지역에만 퍼붓는 일은 현실성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 경우 한미연합군 대응전력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장사정포를 격파할 수 있게 되므로 오히려 북측이 순식간에 궤멸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것. 북측이 이를 각오한 채 상당수 포탄을 서울에 날린다 해도, 사거리를 늘리느라 폭약 양을 줄인 포탄은 지하철역 등의 주요 대피시설은 물론 일반 빌딩이나 아파트의 콘크리트벽도 관통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결국 부상자는 대부분 피격 순간 거리에 나와 있는 이들로 국한될 텐데, 첫 포탄이 떨어져 공습경보가 울린 후에도 대피하지 않는 시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리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노틸러스 연구소의 시뮬레이션 분석은 이렇게 해서 개전 초기 부상자와 사망자를 포함한 인명피해가 적게는 2811명, 최대치로 잡아도 2만9661명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이후 한미 양국군이 대응사격에 나서면 북측 장사정포는 시간당 수십 문씩 격파될 테고, 24시간 뒤에는 절반 이상이 무력화되리라는 것. 북한이 민간 지역만을 향해 포탄을 퍼붓는 극단적인 가정하에서도 최대 예상 피해는 개전 후 일주일을 통틀어 8만 명 안팎. 수백만 국민이 희생당하는 ‘서울 불바다’는 일어날 리 없다는 게 보고서의 확고한 결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사정포 위협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된 가장 큰 계기는 2010년 연평도 포격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122mm 방사포 6문 등을 동원해 170발의 포탄을 날렸으나 그 가운데 80발만이 연평도 안에 떨어졌다. 절반 이상의 포탄이 7km2의 거대한 표적도 맞추지 못한 셈. 당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000여 명이 머무르고 있던 연평도에서는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절반 이상의 경상자를 포함해 60여 명이 물리적 피해를 입었다.
기존 판단과 아무리 차이가 크다 해도, 미국 측 시뮬레이션의 예상 인명피해 8만 명이나 연평도 사례를 적용한 17만 명 내외 모두 우리로서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숫자다. 이에 대해 군사적 대비 태세를 완비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아 있는 문제 역시 명확하다. 장사정포에 대한 공포가 이렇듯 극단적인 형태로 드리워져 있는 동안,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북한의 군사전략과 전력구조에 대한 대응이 더뎌질 수 있기 때문. 북한 군사위협의 무게중심은 이미 대량살상무기로 옮겨가고 있음에도 한국군은 여전히 장사정포를 비롯한 재래식 위협의 그림자에 얽매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평양이 그간 장사정포 전력을 휴전선 인근에 집중 배치한 것은 서울을 인질로 잡아 ‘어떠한 경우에도 남측이 전쟁을 결심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는’ 공포 효과를 노린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를 통해 수백만 인명피해를 위협함으로써 재래식 무기체계인 장사정포를 흡사 대량살상무기처럼 활용해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그러나 2006년 이후 반복된 실험을 통해 핵과 미사일 능력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는 북한은 모든 전력을 전면전 대비에 쏟아붓는 대신 상시적인 국지도발로 긴장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컨대 군사전략의 큰 틀과 전력구조 자체가 핵무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뜻이다. 군 정보당국에서 오랜 기간 일한 예비역 관계자는 이를 두고 “장기판의 왕이 장사정포에서 핵미사일로 바뀐 셈”이라고 비유했다. 익명을 요청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의 말이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위협을 다시 한 번 냉정히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한정된 국방예산과 무기체계를 어떤 우선순위로, 어떤 위협에 대응하는 데 투입할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가 한국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위협 과장이나 낙관론이 모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은 불문가지다. 북한의 군사전략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은 각 군의 이해관계와 타성을 뛰어넘는 가장 효율적인 대안을 만드는 작업이 무엇보다 긴요한 시점이다. 그 출발점은 추상적 주장을 넘어 정교한 근거와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는 위협 평가에 접근하는 작업일 것이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