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혹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그래스(해안 습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 크리스마스펀(밀집된 단단한 잎을 가진 상록 양치식물), 병정이끼(원래 명칭은 British Soldiers로 빨간 열매가 달린 게 독립전쟁 당시 빨간 모자를 썼던 영국군과 닮아 이름 붙음)!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도 있지.
나는 가을에 장작더미에서 검은 귀뚜라미를 보면, 겁을 안 주지. 그리고 바위를 좀먹는 이끼를 보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사랑스러운 사촌.
지구는 둥글다지만 대기권 바깥에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나 둥글게 보일까, 하늘 높이 떠 있는 매의 눈에도 평평하게 보일 테다. 시야가 한정된 우리 작은 존재들에게 지구는 평평하다. 정구공 거죽을 기어가는 벌레, 가령 좀에게 정구공이 끝없는 평지로 여겨지듯이. 몸체가 작을수록 세계는 넓다. 제 큰 키를 자랑스러워하거나 다행스러워하는 게 요즘 추세인데, 다른 생물들은 그만두고 인류만 생각하더라도 그럴 일이 아니다. 땅덩이는 그대로인데 인구가 엄청 늘어난 마당에 점점 커지고 있는 인류의 평균 키는 재앙일 수 있다. 작은 생물은 적게 먹는다. 인류의 멸종 시기를 늦추려면 작아져야 한다. 그것이 진화일 테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