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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30억원만 삼킨 수원 ‘반쪽짜리 육교’

입력 | 2015-01-20 03:00:00

[나라 가계부, 내가 챙긴다/1부 : 줄줄 새는 국고]<上>책임의식 없는 공무원




발걸음 뜸한 천천육교 경기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놓인 천천육교를 지나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뜸하다. 이 육교는 원래 사진 오른쪽 하단의 8차로 도로와 경부선 철로 위를 지나 사진 왼쪽 상단의 아파트 단지까지 연결될 예정이었지만 주민들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건설을 밀어붙인 탁상행정 탓에 철길 위에만 놓인 반쪽짜리 육교가 됐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지난해 말 경기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의 수도권 전철 1호선 성균관대역 주변에 ‘천천육교’가 들어섰다. 경부선 철도와 8차선 도로를 중간에 두고 나뉜 ‘래미안·푸르지오’ 단지와 ‘베스트타운’ 단지를 연결하려고 수원시가 예산 30억 원을 들여 지은 육교다.

하지만 이 육교는 반쪽짜리다. 래미안, 푸르지오 주민들은 철도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와 상가에 쉽게 갈 수 있도록 육교 건립에 찬성한 반면 베스트타운 주민들은 조망권이 침해된다며 반대해 수원시가 길을 반만 건너는 육교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 육교는 철길 위를 지난 뒤 8차선 도로 앞에서 뚝 끊긴다. 길을 완전히 건너려면 육교를 건넌 다음에 다시 500m 떨어진 건널목을 건너야 한다. 성인 남자 걸음으로도 10분 이상 걸린다. 인근 주민들은 사업 검토 과정에서 이처럼 갈등이 첨예한 것을 알았으면 육교를 아예 짓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금만 낭비했다고 지적했다.

재정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재정누수 상황을 6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댐에 비유한다. 구멍을 방치한 채 대야로 흐르는 물을 받아내는 임시방편에만 의존하다가는 언젠가 댐이 무너질 정도로 구멍이 커질 것이라는 경고다.

○ ‘반쪽 육교’처럼 무책임한 곳간 관리

나랏돈이 새는 사례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바닥에 떨어진 공무원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드러난다. 보조금을 떼어먹는 고리에 직접 끼어드는 부정부패부터 보조금 사업을 대충 검증하는 안이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내 돈도 아닌데’ 하는 공무원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다.

전남도에서 투자유치자문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최모 씨는 전남 나주시 공무원들과 짜고 2010∼2012년 ‘지방투자 촉진 보조금’ 70억 원을 빼돌렸다. 최 씨는 자격 미달인 기업들에 접근해 지방으로 이전할 계획임을 입증하는 임대차계약서를 가짜로 만들게 한 뒤 공무원들을 통해 보조금을 받아냈다. 공무원들은 보조금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았다. 부정한 돈에 ‘재미 들인’ 공무원들은 아예 부정수급 대상 기업을 최 씨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런 공문서 위조는 당국이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면 상당 부분 걸러낼 수 있었다. 전북의 T사는 지난해 폐목재를 재활용해 연료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신규 보일러 설치비 명목으로 보조금 1억8000만 원을 지자체에서 받았다가 나중에 적발됐다. 실은 보일러가 이미 설치돼 있는데도 마치 새로 도입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했던 것이다. 지자체가 보조금 지급을 전후해 현장에 나가 보일러를 확인했다면 사전에 부정수급을 차단할 수도 있었다.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은 유사한 부정수급 사례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4∼6월 실시한 부정수급 실태점검에서는 국정과제인 마이스(MICE·기업회의, 포상 관광, 컨벤션, 전시회) 산업 관련 행사를 위탁받은 업체가 위조 세금계산서로 보조금 810만 원을 챙긴 사례가 적발됐다. 부정수급액은 크지 않지만 정부가 큰 관심을 두는 핵심사업에도 구멍이 뚫린 것이다.

○ 부처 간 경쟁에 멍드는 재정

복지예산 중복 지원이란 ‘구멍’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예산이 쏠리는 대신 정작 돈이 꼭 필요한 곳에 가지 않아 재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게 문제다.

일례로 보건복지부의 지역아동센터 사업, 교육부의 초등돌봄교실, 여성부의 방과 후 아카데미 사업은 모두 정규수업 이후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살핀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시도에서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유사 사업까지 합치면 연간 5000억 원 넘는 돈이 정규수업 후 자녀 돌보기에 투입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나 지자체는 복지사업 중복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동일한 사업을 걸러낼 행정 시스템이 없다 보니 이름만 바꾼 선심성 사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도 걸러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경상대 사회복지학과 강욱모 교수가 발표한 ‘진주시 사회복지사업 유사중복 지원 실태조사’ 논문에 따르면 진주시가 시행 중인 235개 복지사업 중 65개가 중복돼 있었다. 이은주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 사업의 실적이 좋으면 비슷한 사업을 만들어 따라 하는 관행 때문에 중복 문제가 심해진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올해 100억 원 이상 신규 보조금 사업에 대한 적격성 심사제를 도입하고 부정수급 사실이 한 번이라도 적발되면 보조금 지급을 영구 금지하는 등의 부정수급 종합대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보조금 사업 집행점검단을 만들어 100억 원 이상 대형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전병목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예산이 배정돼 있다고 해서 보조금 사업을 무조건 집행하기보다 검증을 통해 문제가 드러나면 사업을 철회하는 등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수원=이상훈 january@donga.com / 청주·강화=김준일·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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