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고고학
중도 유적은 1977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사를 시작한 데 이어 1980∼1984년 발굴했다. 주거지와 고인돌무덤(지석묘), 적석총 등 270여 기의 유적이 발견됐다.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무문토기와 철촉, 철도자 등이 포함돼 있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기원 전후의 철기시대 유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도식토기’라고 부른다. 이 토기는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풍납동식토기’와 같은 계통으로 독특한 토기 양식이다.
2010∼2013년의 ‘4대강 살리기’ 사업 때는 춘천의 강원문화재연구소와 예맥문화재연구원이 이곳에서 추가로 유적과 유물을 대량 발견했다. 주거지 917기, 고상가옥 9기, 저장구덩이 355기, 환호(環濠) 1기, 고인돌무덤(지석묘) 101기 등 모두 1400여기의 유물은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9세기∼기원전 6세기)의 것들로 국내 최대의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어림잡아 이 지역에 3000∼4000명의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석기를 제작하는 작업장을 갖춘 공방과 저장창고까지 있는 걸 보면 당시 경제 활동이 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공간 남쪽으로는 경작구역과 무덤구역을 갖추고 있다. 100기가 넘는 고인돌 무덤이 크기별로 질서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중도 유적은 일종의 성곽과 같은 구획을 갖춘 청동기시대의 대단위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사 발전 단계를 따진다면 고조선이 국가 단계로 발전하던 시대에 해당한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이런 유적지가 발견됐다면 아마 몇 십 년에 걸쳐 진지하게 발굴 작업을 벌였을 것이다. 강조하지만 중도 유적도 경주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다. 이런 귀중한 유적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진다면 어떻겠는가. 레저나 관광시설도 중요하지만 유적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조선시대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원상태로 복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중도 유적은 단시일에 발굴된 유적이라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더 발굴에 매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도 유적은 우리가 잊고 있는 고조선의 또 하나의 실체일 수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아주 장구한 역사 유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도 유적 전체를 영원히 보존하고 세밀하게 조사, 연구해 고조선시대 역사를 되살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