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서명한 7·4공동성명이 발단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의 지침에 따른 성명의 1항은 쌍방이 합의한 조국통일의 원칙을 나열한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북은 그해 5월 초 평양을 찾은 이후락에게 김일성이 제시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는 자주국방 등 자주를 중시한 지도자였다. 7·4공동성명도 분단은 외세에 의해 됐지만 통일은 남북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자는 순수한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논란은 처음부터 있었다. 이날 자(字) 동아일보 긴급좌담에 나온 이동원 당시 국회 외교분과위원장은 “이번에 합의된 내용 가운데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고, 또 이를 해석하는 데도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북은 성명 실천을 위해 그해 10월 12일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공동위원장 회의에서 우리 측에 반공정책 중지, 연공정책 채택, 유엔 개입 배제, 미군철수 등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북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때부터 분명했다.
북이 자주통일의 전제로 국가보안법 폐지,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역대 정부가 몰랐을까. 큰 틀의 합의를 위해 북이 딴소리를 할 수 있는 표현을 수용한 것이 문제다.
남북이 미국과 유엔 등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그러지 못하니 분단이 70년이나 지속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남북이 현실을 인정하고 통일원칙에 대해 공통의 해석부터 다시 하는 것이 마땅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가 북과 한 합의 이후 남북이 여러 차례 천명한 통일원칙부터 살펴봤으면 한다. 남북이 기존 합의에 대한 말싸움으로 허송세월하다간 언제 ‘자주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통일을 할지 알 수 없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