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간부 과-차장들의 비애
드라마 ‘미생’ 속 오상식(왼쪽)과 마부장.
고깃집에서 1차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9시. 부장은 불콰해진 얼굴로 “근처 호프집이나 노래방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젊은 팀원들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 뒤에서는 “집에 일찍 가야 하는데…”라는 푸념도 들렸다.
모처럼 흥이 난 부장의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이 된 박 차장은 “말단 사원들이 집에 갈 궁리만 해서야 되겠느냐”며 “명령이다. 오늘 2차는 내 밑으로 열외 없다”라고 후배들을 다그쳤다. 결국 모두 2차 장소로 가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 후배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
○ ‘어느 편에 서야 하나’…슬픈 차장들
차장은 회사의 ‘허리’와 같다. 부장이나 팀장의 지시를 명확하게 후배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신입사원이나 대리, 과장 등 후배들의 불만이나 건의사항을 부드럽게 상사에게 알리는 일 역시 차장의 역할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차장들은 요즘처럼 회사 생활이 ‘가시방석’인 적이 없다고들 하소연한다. 소통이 어렵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회사의 성공이 바로 나의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일에 파묻혀 살아온 임원 및 관리자와 ‘직장은 나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강한 젊은 사원들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직장인들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해 8월 진행한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인의 60.9%가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꼽은 이가 48.1%로 가장 많았다. 서로의 의견을 잘 이야기하지 않아서(27.0%), 팀이나 사내 이슈가 잘 공유되지 않아서(14.1%) 등을 꼽은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김모 차장(41)도 얼마 전에 직속 부장에게 핀잔을 들었다. 후배들이 “회의 시간이 너무 길어 비효율적”이라고 여러 차례 하소연해 이를 부장에게 건의한 게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부장이나 임원의 기분만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배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윤모 차장(40)은 얼마 전 후배들에게 드라마 ‘미생’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가 민망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오상식 차장을 보면 나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며 “후배들은 나를 마복렬 부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라며 아쉬워했다. 사내 정치는 잘 못하지만 일처리만큼은 똑 부러지는 오 차장보다는 가부장적인 데다 출세에 집중하는 마 부장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부하들을 보며 서운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 “직장의 허리? No. 우리는 끼인 세대”
과거에는 차장 등 중간 관리자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직원 간의 화합이나 상호 교류, 또는 윗분들의 생각을 잘 파악하는 정무 감각을 꼽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한 업무 처리 능력을 중요하게 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풍(社風)이 비교적 보수적인 금융권의 경우 이런 문화 충돌이 더 많이 일어나는 편이다.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임모 차장(45)은 “차장, 부장들의 일처리가 서투르거나 업무를 후배들한테 자주 떠넘기는 모습이 보일 때면 바로 ‘무능력한데 월급만 축 낸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직장 내 끼인 세대인 차장들이 이러한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는 노하우를 찾기란 쉽지 않기만 하다. 한 식품업체에 다니는 40대 차장은 요즘 유행인 걸그룹 EXID의 노래 ‘위아래’ 가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원래는 연인 사이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인데 위와 아래 중 어디에 무게중심을 둬야 할지 ‘줄다리기’하는 우리 같은 직장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