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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찢기 고문에 감금까지… 책 살려!

입력 | 2015-01-26 03:00:00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1월의 주제는 ‘배려’]<15>대출도서 수난시대




서울대 도서관 소장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책 ‘맑스를 위하여’ 곳곳에 낙서가 가득 차 있다(위쪽 사진). 서울 반포도서관 소장 유아도서 ‘무지개 물고기’는 이용자들의 훼손으로 누더기가 돼 있는 등 도서관 대출도서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김민 kimmin@donga.com·손가인 기자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책’이에요. 저는 도서관에 살고 있습니다. 보통 가정집에 사는 책은 주인이 한두 명이지만 저는 수십 명 아니 수천 명일 때도 있어요. 조금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 대신 도서관을 벗어나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주인들 가운데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저한테 해코지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가장 흔한 것이 낙서예요. 저나 친구들한테 낙서하는 유형도 가지각색입니다. 첫 번째는 ‘문학비평가’ 유형이에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다들 아시죠?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에 있는 이 친구에게는 구절마다 비평이 적혀 있어요. 제 친구를 보다가 날카로운 비평의식이 샘솟는 건 이해하지만 뒷사람도 생각해 주셔야죠. 두 번째는 ‘공부벌레’ 유형이에요. 외국어 책을 보면서 모르는 단어의 뜻을 적어놓거나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놓는 경우죠. ‘단어가 너무 어려운 탓’이라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토익 토플 같은 어학 교재를 빌려놓고 모든 문제에 답변까지 써놓은 사람들은 심한 것 같아요.

세 번째는 ‘재활용’ 유형이에요. 여백만 있으면 책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낙서를 하는 것이죠. 서울대 도서관의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라는 책에는 수학 공식이 잔뜩 적혀 있어요. 아마 빌려간 사람이 수학 공부를 하나 봐요. 수학책 놔두고 왜 미술책을 빌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네 번째는 ‘애정 과잉형’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면 마구잡이로 찢어가는 겁니다. 자신은 좋아서 그랬다는데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으니 정말 양심 불량인 셈이죠. 비슷한 이유로 아예 책 속의 문장을 고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키르케고르)을 빌려본 어떤 사람은 번역이 이상했는지 ‘친절하게’ 글자를 지우고 다른 단어로 바꿔놓았어요.

낙서보다 더 나쁜 건 ‘책 유괴범’이에요. 책을 한 번 빌리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자기 집에 ‘납치 감금’해두는 사람들입니다. 서울대 도서관은 6개월 이상 장기 연체 도서가 417권(23일 기준)이나 돼요. 최장기 연체 도서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보시니 참 좋았다’, 박경리 선생님이 쓴 ‘성서와 마녀’예요. 이 두 책은 7년 넘게(25일 기준으로 2589일)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보급 소설가들의 작품인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눠 봐야 하는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장기 연체 도서 중에는 전공서적도 많습니다. 책값이 워낙 비싸다보니 한 학기 동안 통째로 대출하는 사례가 많아서 그렇답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전공서적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이유입니다. 아, 이런 사람도 있어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출한 책을 우산 대용으로 쓰는 사람들요. 비를 맞으면 종이가 한데 들러붙어 책을 버려야 합니다.

도서관까지 오는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요.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배려하면서 저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황성호 hsh0330@donga.com·김민·손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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