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와 클럽서 출발, 가요계와 해외로 쭉쭉
《 “기성곡들은 연주가 서툰 저희가 따라 하기 버거웠어요. 그래서 그냥 우리가 만들자고 했죠. 처음 자작곡 두 개는 영어 가사를 붙였는데 외국인 관객들이 ‘왜 한국어 놔두고 영어로 가사를 썼느냐’고 하더라고요. 세 번째 자작곡이자 첫 한국어 노래가 ‘말달리자’였죠.”
― 크라잉넛 멤버 한경록
지난해 6월 서울 마포구 어울마당로 KT&G상상마당에서 록밴드 파블로프의 보컬 오도함이 관객의 목말을 타고 객석을 누볐다. 인디는 ‘인디펜던트(독립적인)’의 약자다. 생산자도, 소비자도 자본과 어른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음악으로 그려낸다는 의미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제공
○ 해보자, 우리끼리
한국 인디 음악은 왜 하필 1995년 빅뱅을 일으켰나. 당시 미국 팝 시장의 날갯짓이 있었다. 1990년대 초 미국 주류 팝 시장까지 장악한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은 단순한 기타 연주만으로도 묵직하고 그럴듯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 원형은 연주가 쉬운 펑크 록이었다. 연주력은 일천하지만 아이디어와 패기 넘치는 한국 젊은이들이 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베인 추모공연이 인디 출발의 구심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크라잉넛의 한경록은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같은 해외 펑크 록 음반을 홍대 앞 음반점에서 구할 수 있었고, 비교적 연주가 쉬운 곡들을 따라 하다 자연스레 우리 노래를 직접 만들게 됐다”고 했다.
1980년대부터 헤비메탈 그룹사운드들이 서울 남영동 송설라이브나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합동공연을 했지만 이들은 주로 해외 밴드의 음악을 그대로 따라 했다.
1997년 서울 신촌 거리에서 공연하는 록 밴드 크라잉넛. 크라잉넛 제공
인디 음악의 터전은 20년째 서울 홍대 앞 일대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가슴과 머리는 뜨거운, 젊은 예술인, 강남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드럭’을 필두로 ‘스팽글’ ‘프리버드’ 같은 라이브 클럽들이 우후죽순처럼 문을 열자 뭔가 새롭고 재미난 걸 찾는 청춘들이 몰려들었다. 1998년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전국적으로 히트했고 ‘인디’ ‘홍대’는 누구나 아는 단어가 됐다. 1999년 라이브 클럽 영업이 합법화됐다. 주요 언론에서 이들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몇몇 밴드는 TV 가요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카우치의 성기 노출 사건(2005년)으로 분위기가 얼어붙기도 했지만 자우림, 루시드폴, 장기하, 국카스텐은 인디 출신 국민 스타가 됐다.
한국 인디는 20년간 장르와 무대의 외연이 크게 넓어졌다. 1990년대만 해도 ‘인디’ 하면 펑크 록이나 모던 록이었지만 요즘은 월드뮤직까지 안으로 들어왔다.
국악을 가미한 록 밴드 잠비나이는 지난해 여름 유럽 14개국 순회공연을 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미국의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페스티벌,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같은 세계적 축제들이 한국 밴드들에 러브콜을 보냈다.
2000년대 이후 인디 음악은 아이돌 음악의 대안을 찾는 광범위한 고정 팬을 갖게 됐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20, 30대 여성이 주 소비자로 떠올랐다”면서 “최근엔 기술적 완성도는 높은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밴드가 많은, 상향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인디 음반 제작사 모스핏은 황신혜밴드, 크라잉넛, 노브레인부터 장기하와 얼굴들, 로큰롤라디오까지 20여 개 팀이 참여하는 인디 20주년 기념 음반 ‘20’(가제)을 3월 초에 내놓을 계획이다. 제작자는 크라잉넛의 전 매니저인 김웅 모스핏 대표다. 그는 “인디 음반사는 시스템을 더 전문화하고, 정부는 가요계 전반이 공정 경쟁할 수 있도록 차트를 정비하고 통계를 마련해야 한다. 일률적인 음원 가격을 생산자가 정할 수 있도록 법제를 고치는 것도 음악계의 다양성을 장려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