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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거구제땐 지역분열” 경고… 노태우 측은 귀를 막았다

입력 | 2015-01-31 03:00:00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4〉망국의 소선거구제




1992년 3월 31일 서울 중앙박물관 앞 주차장. 민자당 김복동, 박세직, 금진호 의원(왼쪽부터)이 청와대에서 열리는 14대 총선 당선자 대회 참석을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친인척 출마 불가’ 방침으로 13대 총선을 포기했던 김복동, 금진호 두 사람은 14대 때 나란히 당선했다. 동아일보DB

전경환의 다음 케이스는 염보현 전 서울시장이었다. 염 시장은 오래전부터 노태우 대통령에게 찍힌 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내무장관으로 있을 때, 염보현은 경기도지사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 씨가 경기도 화성에서 수목원을 운영했는데 염보현은 지사로서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노 장관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염보현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됐을 때도 그랬다. 염 시장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87년 대선 때 시장 자리를 내팽개치다시피 하면서 뛰었다. 사실 여의도 광장에 100만 군중이 모이도록 한 데는 뭐니 해도 염 시장의 공로가 컸다.

나는 여의도 유세 직후 노 후보와 염 시장의 관계 개선을 은근히 유도했다.

“제가 저녁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격려 한번 해주십시오.”

그렇게 저녁자리를 마련했지만 노 후보가 한 말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수고했습니다.”

염 시장은 노 후보가 당선되자마자 사의를 표했고, 12월 29일 사표가 수리됐다. 며칠 뒤 나는 염 시장을 만나 “왜 사표를 서둘러 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방에서 압력이 오는데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듬해 4·26 선거가 있기 이틀 전 ‘염보현이 다음번 비리 케이스’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당시 청와대의 수법은 먼저 언론에 흘리고 다음에 칼을 뽑는 수순이었다. 언론을 잘 아는 사람의 수법이다.

나는 부랴부랴 채문식 대표를 찾아갔다.

“선거가 내일 모레인데 왜 오늘 염 시장 건이 터져 나옵니까? 서울선거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채 대표의 말이 의외였다.

“이 의원!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국민들에게 비리척결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 더 좋을 터, 그리고 지금 추세대로 가면 표가 너무 많이 나올까봐 걱정입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세상에 어느 정당이 의석이 너무 많이 나올까봐 걱정한단 말인가?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민정당은 참패하고 말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선거패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선거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우리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언론과 국민들조차도 의아해할 정도의 참패였다.”

노 대통령의 평가를 보고 나는 이분이 그때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는 데 놀랐다. 그는 직접선거로 당선되었으니 총선거에서도 표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거법도 소선거구제로 개정했고, 공천도 엉망으로 끼워 팔았다.

사실 13대 총선은 노 대통령 취임식 직전이나 직후에 실시하는 것으로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12대 총선이 85년 2월 12일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2월 선거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선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고 나가야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태우 당선자 측근 정략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2월 선거를 하게 되면 아직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공천 작업을 하게 되므로 ‘5공 인물’들이 끼어들게 돼 새 판을 짤 수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때까지의 1구 2인제를 1구 1인제로 개정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공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기회에 ‘노태우 사람’들을 당내에 대거 포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법을 고쳐야 한다는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고, 선거법 개정을 위해 총선을 늦추자고 한 것이다.

나나 박태준 선배(당시 전국구 의원)는 반대하는 쪽에 섰다. 나는 의원총회에서 반대론자로 나섰다.

“선거법이란 그 나라의 국민성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남부유럽은 대개 1구 다인제의 중·대선거구제입니다. 북부유럽은 1구 1인제를 채택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남부는 성향이 다혈질이고 감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선거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북부는 냉정하고 이성적입니다. 바람선거로 정권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성향은 어떻습니까? 나는 남부유럽에 가깝다고 평가합니다.”

“소선거구제로 가면 틀림없이 지역에 따른 표 쏠림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필시 지역당 현상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국민을 통합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소선거구제 주창자들은 “1구 2인제는 유신 잔재”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내세우며 무조건 반대했다. 사실 이대순 원내총무도 소선거구제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소선거구제로 가면 민정당이 완승하든가, 아니면 완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승하여도, 완패하여도 정치적으로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완승하면 야당이 부정선거 시비로 극한투쟁을 하게 될 것이고, 완패하면 여소야대가 되어 정권의 위기가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야가 적당하게 균형을 맞추어 당선되려면 현행선거법으로 그대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미 세뇌가 돼 있었다. “어떻든 유신잔재인 1구 2인제는 찬성할 수 없소. 그러니 여야 간 타협을 잘해보시오.”  
▼ 김복동 총선 출마 말려달라던 노태우… 정작 金에겐 “이종찬이 주동” 떠넘겨 ▼

대통령 친인척 출마 금지령


1987년 대선이 끝난 직후 어느 날, 강창성 명지대 교수가 김복동 광업진흥공사 사장과 이종찬 의원을 오찬에 초대했다.

‘윤필용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하나회 색출에 앞장섰던 강창성은 1980년 신군부 등장과 함께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 그 즈음 막 명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복동 사장은 육사 11기로 노태우 당선자의 처남이었지만, 강창성이 사단장 시절 그 밑에서 대대장을 해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이종찬은 강창성이 중앙정보부 차장보 시절 그의 보좌관이었고….

하지만 이종찬은 조심스러웠다.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 때 노태우 대령도 조사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강창성은 윤필용 장군을 비롯해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요직에 있는 경상도 출신 장교들 모두를 무자비한 숙청대상으로 삼았다”고 썼을 만큼 강창성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마침 노 당선자와 승용차를 함께 탈 기회가 생기자, 이종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 장군과 저, 그리고 김복동 장군이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는데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고 있습니다.”

노 당선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요? 아주 잘됐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기회가 좋은데, 가서 김복동 장군에게 후배로서 말려 주시오. 대구에서 출마할 생각하지 말라고 말이오. 요새 내가 골치 아파 죽겠소.”

그런데 정작 오찬장에서 김복동의 출마 문제를 꺼낸 건 강창성이었다.

“김 장군! 이번에 출마하려고 그래?”

“네. 사실 전두환 시절 내내 물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출마하려니깐 웬 잡소리가 그렇게 많은지…. 사무실을 열었다가 어제 폐쇄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국회의원은 다음이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종찬도 거들었다.

“선배님 결심 잘하셨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일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종찬은 얘기가 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후 김복동 사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화가 나 있었다.

“어제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신이 주동해서 나의 대구 출마를 반대했다고 하던데 그럴 수가 있소. 내가 당신 진로에 걸림돌이라도 된단 말이오?”

이종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오해입니다. 나는 노 대통령이 선배님 출마를 만류해 달라기에 저번에 한번 말한 게 전부입니다.”

“노 대통령이 분명히 말했어요. 후배들이 반대하고 있다, 이종찬이가 주동하여 반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과 달리 ‘거물 친인척’이 많았다. 김복동이 그랬고, 손아래 동서인 금진호는 5공 때 상공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금진호도 13대 출마를 원했다.

“제2부속실에서 영부인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2층 내실로 갔다. 영부인은 제부(弟夫)인 금진호 전 장관이 출마를 원한다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중략) 하지만 민정당과 청와대 정무 파트의 ‘친인척 배제론’을 넘어설 수 없었다.”(박철언 회고록)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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