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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 교수의 소프트파워 강국 백제의 비밀] 동북아 의료강국

입력 | 2015-02-02 03:00:00

倭에 의박사 파견 역질 퇴치… 채약사제도는 中國보다 앞서




10세기 후반 일본의 의학서적 ‘의심방(醫心方)’에 수록된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 백제의 독자적인 종기 치료법 등이 소개돼 있다.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아프리카 대륙에서 창궐한 에볼라 뉴스에 시시각각 귀를 기울인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멀리 떨어진 한반도 역시 에볼라 영향권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국가 간 교류가 질병의 확산으로 이어진 사례는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지로서 여러 나라와 활발히 접촉한 백제도 전염병의 위협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의 의술을 받아들여 질병을 다스리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의·약학을 발전시켰다. 의학 교육과 치료를 담당하는 국가기구로 ‘약부(藥部)’를 설치했고 여기에 ‘의박사(의사)’와 ‘채약사(약사)’들을 뒀다.

특히 채약사 제도는 중국보다 30∼40년 먼저 실시돼 약학에서 백제가 중국보다 한발 앞섰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서인 ‘주서’에도 “백제가 의약기술을 잘 알고 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채약사들이 채취한 백제 인삼은 고구려보다 약효가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받아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백제 의학서적 ‘백제신집방’에 실려 있는 종기 치료법을 살펴보면 국화잎을 찧어 즙을 내 먹는 중국식 처방을 인용하는 동시에 국화 줄기도 약재로 사용하는 고유의 처방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백제만의 독자적인 치료법을 발전시킨 사례다.

뛰어난 수준의 백제 의·약학은 훌륭한 외교자원이 됐다. 서기 553년 역질에 시달리던 왜는 의료 강국인 백제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백제는 이듬해 의박사인 나솔 왕유릉타와 채약사 시덕 반풍량, 고덕 정유타 등을 파견하는데 이후 역질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의 의술이 역질 퇴치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왜는 555년 백제가 신라 공격에 나설 때 지원군을 보내는 것으로 보답한다. 백제는 의승(醫僧) 관륵과 주금사(呪금師·주술 치료사)를 파견하고 왜는 백제에 군사 지원을 하며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백제가 멸망한 뒤 왜는 백제의 의학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해 의학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예컨대 발일비자찬파라금라금수(B日比子贊波羅金羅金須)와 귀실집신(鬼室集信)이 ‘대산하(大山下·왜의 26관등 중 15위)’의 관위를 받고 달솔 덕정상과 길대상이 소산상(小山上·16위)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백제사에서 질병을 다스리는 역량이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대표적 사례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암 투병을 들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해동의 증자(曾子·효성이 지극했던 공자의 제자)’로 불렸고 백제 멸망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탈환할 만큼 의욕적이던 의자왕이 갑자기 방탕하게 바뀐 데는 그가 앓던 ‘반위(위암)’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의술로 이를 치료할 수 없었던 의자왕은 당나라 태종에게 반위 치료로 이름을 날리던 의사 장원창(蔣元昌)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먼 지역에 파견을 나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몸이 아파 만사가 귀찮고 허무해진 의자왕은 향락에 빠져들었고 그 틈을 타 젊은 왕비 은고를 앞세운 세력들이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결국 멸망을 부르고 말았다.

백제가 그러했듯 뛰어난 의료기술을 갖춘 한국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상황이다. 의료봉사와 의료교육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의학 한류’의 입지를 드높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