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지난해 가을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젊었다. 왜소하긴 했지만, 건강상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처음 본 내게 “이번 신간은 반응이 좋아서 어제는 15권을 팔았다”고 말할 만큼 붙임성도 좋았다.
며칠 뒤 취재를 다녀오다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20대의 사지가 멀쩡한 청년이 판매원이 된 사연을 듣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집이 없어서 임시로 머물던 곳에도 없었다. “예전에 다친 어깨와 발목을 종교단체의 지원으로 수술 받게 됐다”며 “수술까지 남은 한 달간 한 권이라도 더 팔면서 저축을 하겠다”던 그였다. ‘의지가 약해졌나? 갈 거면 얘기라도 하고 가지.’ 원망을 거듭하다가 배신감이 쌓여갈 무렵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옛날에 잘못한 일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며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불안하고 무섭다”고 했다.
“말도 없이 가버린 게 죄송해서 전화 안 하려고 했었는데요. 사람들이 말할 기회도 안 주니까 전에 제 얘기 끝까지 다 들어준 편집장님이 생각났어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참 인색한 시대다. 업무가 바쁘거나 주위에 말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까? 혹시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의 기준이 화자(話者)의 배경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끄럽게도 내가 그랬다. 이전 직장에서 보도자료 설명하려는 전화가 쇄도하면 늘 ‘큰’ 출입처의 전화만 내용까지 듣곤 했다. 나머지는 “메일로 확인할게요”라고 잘랐다.
무명이 이렇게 서럽다면, ‘전과자’는 오죽할까. 그날 “말 할 기회를 안 준다”고 하소연하는 그 판매원의 전화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과거의 전과가 발목 잡는 상황을 설명하는 그와의 통화는 저녁밥 메뉴를 이야기하도록 계속됐고 어느덧 나도 내 신세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이 들을 뿐 서로 위로나 조언은 할 줄도 몰랐다.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도, 이튿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할 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틀 전 그가 전화 통화 중에 말했다. “저 병원에 가서 수술 받을래요. 예전에도 계속 그랬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는데요. 정말 잘해보고 싶어요.”
물론 남의 말 들어주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거짓말쟁이도 많아서, 화자의 배경을 안 따지고 이야기 듣는 건 더 어렵다. 하지만 귀를 여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일이 아닐까? 내가 귀 막았던 보도자료에 어떤 기발한 아이템이 있었을지 누가 알까. 하소연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용기를 찾은 그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이영민 빅이슈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