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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냉이 달래 그리고 ‘봄∼똥!’

입력 | 2015-02-04 03:00:00


김화성 전문기자

입춘(立春). 봄이 도둑처럼 오고 있다. 온갖 생명들이 우두둑! 우두둑! 손마디를 풀고 있다. 봄은 입맛으로부터 온다. 혀는 요물이다. 겨우내 찌든 군둥내에 진저리를 친다. 입안이 온통 밍근하고 헛헛하다. 풋것에 몸이 달뜬다. 그저 발만 동동, 사무치고 애가 탄다.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의 세포가 자지러진다.

봄동은 역시 ‘봄∼똥!’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동’은 그 소리가 입술이 약간 열린 상태에서 밋밋하게 그대로 머물지만 ‘∼똥’은 입술이 꼬물꼬물 동그랗게 오므려지면서 스리슬쩍 어깨춤이 들썩여진다. 깨끼춤, 절굿대춤, 막대기춤, 엉덩이춤, 뚝배기춤…. 햐아, 그 봄의 튕김과 흥성거림 그리고 수런거림.

봄동은 마치 ‘봄이 똥을 눈 것처럼’ 한겨울 땅바닥에 퍼질러 누워 자라는 ‘납작배추’ ‘떡배추’를 말한다. 전남 해남 완도 진도 신안 등지의 밭 자락에서 말라붙은 소똥처럼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큰다.

겉잎은 뻐세고 푸르뎅뎅한 데다 구멍이 숭숭하다. 온몸에 검댕 묻은 부엌강아지처럼 흙먼지 범벅이다. 가운데 배춧속은 무늬만 노랗지 꽉 찬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영락없이 ‘폭탄 맞은 노숙배추’다. 잎이 옆으로 펑퍼짐하게 퍼져 영 볼품이 없다. ‘할머니 단속곳에 꼬깃꼬깃 접힌 채로/뒷심만 눌어붙은 천 원짜리 지전(정용국 시인)’이다. 하기야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한뎃잠을 자며 지냈으니 오죽하랴.

‘봄이 똥을 싸다 들켜놓고 혼자 웃지요/노상에서 넙죽하게 퍼질러 앉아 웃고 있는 할머니 닮았지요/대책 없이 둥글게 너부러진 말똥도 닮았지요/와락, 저질러 논 그것 세상에 들켜버렸지요/들켜놓고 혼자 웃지요’(금별뫼의 ‘봄똥’ 전문)

봄동은 못생겼어도, 맛은 으뜸이다. 아삭! 아삭! 입안 가득 퍼지는 그 연한 봄내! 한입 즈려 씹는 순간 양철지붕에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아득하다. 달짝지근하고, 새콤하고 상큼시원한 데다가 풋풋하다. 된장에 무쳐 먹거나 양념장에 참깨 조금,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버무려 먹어도 ‘어화둥둥! 봄이로구나!’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살찐 농어가 풍덩풍덩 뛴다. ‘입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인(안도현 시인)’다.

봄은 땅기운으로 먼저 온다. 꽃샘잎샘이 아무리 맵차도, 땅속은 몽글몽글 순하고 아늑하다. 봄동이나 냉이 달래는 그 연하고 순한 흙에 뿌리를 굳게 박고 새순을 틔운다. 순잎이 봄이다. 숨탄것들은 이른 봄 새싹을 먹으며 기운을 차린다. 마루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삽살개도 저춤저춤 들판에 나가 보리 싹을 뜯어 먹는다. 그렇게 칼슘이나 비타민을 보충한다.

냉이는 술꾼들 간 다스리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된장과 찰떡궁합이다. 된장국에 냉이 몇 뿌리만 넣어도 ‘봄 처녀 제 오셨네!’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살짝 데친 뒤 소금과 들기름으로 무쳐 먹어도 맛있다.

달래는 매콤하고 쌉싸래하다. 알큰한 ‘작은 마늘’이다. 달래 먹고 맴맴, 코를 톡 쏘는 맛이 그만이다. 조선양념간장에 날로 넣어 먹는 ‘달래간장’이 최고다. 달래는 칼이나 호미로 캔다. 하얗고 둥근 뿌리가 미끈 섹시하다.

봄은 기척이다. ‘또르르 똑 똑 똘랑∼’ 처마 끝 낙숫물 소리. ‘싸그락∼싸그락∼’ 바닷가 몽돌들이 서로 몸 비비는 소리. ‘차랍∼찹! 찹!’ 밤새 강아지 밥그릇 핥는 소리.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목련나무 꽃망울. 먼 산 하롱하롱 어찔어찔 아지랑이. 버슬버슬 물러 터져 진물 쩍쩍 흐르는 산비탈 놀란흙….

요즘 봄동 냉이 달래는 발가락으로 무쳐 먹어도 맛있다. 그 속엔 칼바람 한 줌, 얼음 한 덩이,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각시방 영창의 수정고드름 하나, 섣달 밤에 눈썹달 비껴가는 기러기 한 마리, 북풍한설 산비탈에 뽀얀 맨살로 서 있는 겨울자작나무 한 그루가 들어 있다. 온갖 만고풍상이 버무려져 비로소 봄맛을 낸다.

왜 천자문(千字文)엔 봄 ‘春(춘)’자가 없을까. 그것은 그 책을 중국 남쪽나라(梁·양) 사람(周興嗣·주흥사)이 지었기 때문이다. 늘 따뜻한 나라엔 봄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 봄은 얼음나라에 온다. 땡땡 얼어붙은 만주벌판에 온다. 얼음장 밑에 물고기가 요동치고, 눈밭 속에서 보리 싹이 움튼다.

문득 “봄∼똥!” 하고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본다. 눈꺼풀에 햇살부스러기가 간질간질 내려앉는다. 귓가에 투욱∼툭! 산수유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아련하다. 봄이 달다. “보옴∼똥!” <끝>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