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5〉중간평가
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 개막식장의 노태우 대통령. 그는 그 전해 12월 12일 서울 여의도 유세에서 “올림픽이 끝난 후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공약했다. 동아일보DB
“자네 어려운 선거를 잘 치렀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주기 바라네. 특히 중요한 것은 자네에 대하여 군부에서 말이 많았다는 것을 명심하게. 사실은 지난번 공천 때도 여러 사람이 자네를 나쁘게 말하더구먼. 그러나 나는 서울 선거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지. 이제 언행을 조심하고 야당에 대하여 관계를 잘 유지해주기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오해받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특별히 군부라고 하셨는데 군부라면 누구를 더 제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군부라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네,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청와대를 물러나왔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고, 그 다음이 아마 정무장관인 나였을 것이다.
다행히 1988년 하반기에 들어서자 서울 올림픽 무드가 전국에 퍼져 노동계나 학생들의 소요도 잠잠해졌다. 5공 특위 활동도 중지한 상태였다.
나는 정무장관으로서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또다시 사회불안 상태가 재연될 것이고, 자칫 노태우 정부가 ‘식물정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얽히고설킨 시국을 돌파하는 길은 국민과 약속한 그대로 재신임을 묻는 방법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올림픽이 끝난 뒤 두어 차례 정무보고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진언했다.
“1975년 월남 공산화 이후 ‘다음 차례는 한국이다’라는 풍문이 나돌고 사회적으로 곳곳에서 불안과 소요가 있었을 때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김영광 당시 중정 판기실장이 신직수 부장을 수행하여 청와대에 가서 여러 가지 대안을 브리핑했습니다. 그 가운에 ‘국민투표방안도 고려할 수 있음’이란 내용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송구하여 작게 써서 브리핑 차트에 끼워 넣었습니다. 김 실장이 그 부분은 따로 설명하지 않고 슬쩍 차트를 넘겼는데 박 대통령은 차트를 뒤로 다시 넘기라고 한 뒤 ‘다른 방안은 필요 없어. 그 방안이 좋겠어. 그대로 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국민투표를 하게 됐는데 결과는 75% 지지로 나와서 정국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투표하면 자네 생각은 자신 있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국민들은 사기가 올라갈 겁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정부에 대한 지지가 65.2%로 나왔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동안 올림픽 성공시키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이제 대사도 끝났으니 여러분이 당선시켜주신 대통령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한번 밀어 주십시오’ 이렇게 호소하면 거부할 국민들이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모저모 재는 듯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겠네. 내가 좀더 깊이 생각을 해 보겠네.”
10월 2일, 드디어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폐막되었다. 그 직후 5공 청문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청문회 정국의 시작이었다.
그럭저럭 1988년이 저무는 시점에도 청와대는 중간평가를 한다든지, 안 한다든지 도무지 나의 건의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11월 21일 나는 정무장관으로 월례보고차 다시 청와대에 올라갔다. 더이상 여소야대 정국에 끌려다녀서는 올림픽으로 흥분했던 국민의 마음도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국민투표를 해도 점점 결과를 점치기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내 자신 초조해졌다. 마음을 크게 먹고 노 대통령에게 간 것이다.
“제 판단으로는 올해가 가기 전에 결단을 내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몹시 표정이 흐려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6·29 선언 때 한번 벼랑에 서서 결단을 내렸으면 됐지, 왜 자네는 자꾸 나를 벼랑 끝으로만 몰고 가려고 하는가?”
나는 그 순간 ‘이분이 마음이 달라졌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이상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보처럼 나는 한마디를 더 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번만 더 벼랑에 서시면 대통령으로서 현 상황을 당당하게 정면 돌파하게 되고, 여소야대도 극복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건의 드린 것입니다.”
1968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국민투표 실시를 명하면서 “다 잃거나 두 배로 딴다”라고 했다. 나는 드골 대통령의 그 말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싶었으나 또 다른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말을 삼갔다. 결과적으로 드골이 국민투표에서 패했기 때문에….
▼ 詩人 백성남 술자리서 불쑥 “아, 언제든 그만둔다고 해” ▼
노태우 ‘재신임 투표 공약’ 어떻게 나왔나
“트럭을 개조한 오픈카를 타고 광장으로 들어갈 때의 그 벅찬 감동은 글로써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의 조화가 아닌가 싶었다.”(노태우 회고록)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서울 여의도 광장의 100만 인파, 그것도 자기 이름 “노태우”를 연호하는 100만 인파는 그의 흥분대로 ‘신(神)의 조화(造化)’로 보였을 것이다.
1987년 12월 12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서울 여의도 유세가 있기 얼마 전. 외곽에서 ‘한가람 기획’이라는 팀을 만들어 노 후보를 돕고 있던 이영호 전 체육부 장관은 거리에 붙어 있는 선거포스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12월 12일. 가자, 여의도로! 제2의 6·29 선언.’ 당에 전화를 걸어 “제2의 6·29 선언이란 게 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그냥 유권자 동원용으로 써놓은 것”이라는 대답뿐이었다.
판세는 박빙이었다. 6·29 선언에도 불구하고 특히 수도권의 고학력 중산층 유권자들은 김영삼(YS) 후보의 ‘군정종식’ 호소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유권자 동원용의 ‘냉무(내용무)’ 포스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제2의 6·29 선언이 절실했다.
“아무것도 없으면 이건 사기나 마찬가지인데, 진짜 뭐가 없을까?” 이영호는 외곽 팀에 함께 있던 전병민 전 현대사회연구소 정책기획실장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이영호는 노 후보가 초대 체육부 장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 밑에서 차관과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이를테면 노태우의 ‘올림픽 인맥’이었다. 그 이후엔 5공 정권의 싱크탱크로 만든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으로 가 있었는데, 이때 훗날 YS 정부의 초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되는 전병민과 만나 한 팀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영호와 전병민의 고민을 해결해 준 건 전병민과 친구처럼 지냈던 시인 백성남이었다. “아, 그러면 나중에 언제든 그만둔다고 해라.” 술자리에서 전병민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백성남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시보다는 풍자산문으로 더 알려졌던 백성남에겐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순발력이 있었다.
전병민은 무릎을 쳤다. ‘제2의 6·29 선언=중간평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영호는 전병민이 마련한 중간평가 공약을 들고 노 후보의 핵심 선거참모인 최병렬 의원에게 달려갔다. 대통령의 임기를 건 공약이니만큼 선거팀 안에서도 찬반 논란이 일었다.
후보 본인의 결심이 필요했다. 최병렬이 노 후보의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전병민(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의 증언. “노 후보가 ‘지금은 당선이 최우선’이라며 두말없이 받아들이더라는 말을 들었다.”
노 후보는 100만 군중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6·29 선언과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범주에는 대통령직 사퇴도 포함됩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