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명박 악연 미국산 쇠고기에서 시작돼 촛불로 타올라 박근혜 관련 대목은 거의 모두 뺐지만 회고록 출간 타이밍 논란 여전 문재인 야당 대표 선출 맞물려… MB 회고록 협공당할 수도
황호택 논설주간
‘대통령의 시간’은 대통령 당선인 MB가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남은 임기 중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수차례 약속한 한미 쇠고기 협상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MB의 일방적 기대였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쇠고기 협상을 타결할 의사가 있었으면 임기 중 진즉 했지, 퇴임 일주일을 남겨놓고 후임자를 도와주기 위해 ‘친미(親美)’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MB는 531만 표의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고서도 미국산 쇠고기의 덫에 걸려 취임 초기 골든타임 6개월을 허송했다. MB가 취임 두 달 만에 한미 쇠고기 협상을 타결 지은 후 MBC에서 PD수첩 ‘광우병’ 편을 방영하면서 촛불시위가 광화문 일대를 집어삼켰다. 촛불시위가 가라앉은 뒤 국세청이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 박연차 씨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박 씨를 털면 노 전 대통령에 닿는다는 것은 권력기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한 전직 검찰총장은 “박연차의 ‘ㅂ’ 이야기만 꺼내도 노무현 청와대에서 과민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세무조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부엉이바위의 비극으로 이어지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겠지만 회고록에서까지 못한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MB 쪽은 회고록을 펴낸 뒤 노무현의 ‘영원한 비서실장’이 야당 대표로 선출되자 더욱 신경이 쓰이는 분위기다.
MB-박근혜 관계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부터 세종시 수정안까지 별도로 책 한 권을 내야 할 정도로 복잡했지만 대부분 빠졌다. 김두우 전 홍보수석은 회고록 별책부록에서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이 대목을 다시 쓰겠다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뜻”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를 두고 청와대를 향해 카드를 흔들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MB 쪽은 “음모론”이라고 펄쩍 뛴다. 현직이 죽을 쑤고 있는 시기에 회고록을 펴낸 타이밍을 놓고서도 논란이 있다. 미국 대통령들도 대개 퇴임 후 2∼4년 사이에 회고록을 낸다. 2년 동안 MB 정부 각료와 청와대 비서진의 회고록 세미나가 이어지면서 “이젠 숙제를 마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지만 최근의 정치 기류를 보고 더 미룰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MB 회고록은 ‘안타까운 세종시’ 편에서 “내가 세종시 수정을 고리로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2012년 여당의 대선 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됐다. 박 전 대표 측이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기술했다. MB는 박근혜의 대항마로 내세우기 위해 정운찬 전 총리뿐 아니라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 쪽에도 계속 펌프질을 했고 김태호 전 경남지사까지 총리 후보로 징발했다가 실패했다. 박 대통령은 정 전 총리에 대한 견제구가 아니라 캐스팅 보트를 쥔 충청 표심을 사기 위해 반대표를 던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물론 선진국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도 분할이 이뤄진 데서 오는 국정의 비효율은 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목이다.
MB의 회고록은 정치인이나 정책 입안자 그리고 언론인이 참고자료로 활용할 만한 부분이 많다. 다만 그러잖아도 앙앙불락인 대통령 클럽의 갈등을 악화시키고 전운(戰雲)을 예고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