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가 감독한 영화 ‘허삼관’의 한 장면. 동아일보DB
설날을 일주일 앞둔 아름다운 시점에 이런 재수 없고 토 나오는 자기 자랑을 내가 왜 늘어놓느냐 하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명연기를 하는 배우들에게도 던지게 되기 때문이다. 명배우들을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배우들의 대답은 천차만별이다. 한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A는 “배우는 경험하지 못한 것은 연기할 수 없다.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배우는 최대한 많고 극단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이혼 후 내 연기가 깊어진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했고, 자기 자신은 연기를 꽤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땐 영 과장된 연기만 하는 배우 B는 “억압이나 가난, 혹은 고통이 예술가를 만들어 낸다. 고통 받지 않으면 연기할 수 없다”고 잘난 체했다. 최근 할리우드에도 진출한 배우 C는 “어떤 이유로 이런 연기를 하게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배역을 하든지 간에 나의 연기는 내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나 중 하나라는 점”이라고 뭔가 있어 보이게 말했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보이지만 연기만 하면 거의 ‘빙의’ 수준의 연기를 하는 여배우 D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알아서 잘 써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명연기는 학습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만 원래부터 명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명배우가 될 뿐.’
영화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배우가 있는데, 바로 하정우(37)다. 놀랍다. 그가 29세 때 간담이 서늘해지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한 영화가 ‘추격자’였고, ‘황해’가 개봉된 것은 32세 때였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로 그가 ‘충무로 대세’를 넘어 ‘연기 지존’이란 소리까지 듣게 된 시기는 그의 나이 겨우 34세 때였다. 하정우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중반에 이미 송강호에 필적하는 연기력과 티켓파워를 보여 주면서 톱클래스의 개런티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젊은 나이에 세상 밑바닥까지를 죄다 핥아 본 듯한 쇼킹한 연기를 할까. 하정우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리고 그의 내면엔 도대체 어떤 예술가적 열망과 욕구불만과 간절함과 비전이 있기에 활화산 같은 연기를 할까.
올해로 85세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석양의 무법자’(1967년)에 출연했을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시가 하나를 입에 문 채 웃지도 찡그리지도 화내지도 않는 무표정으로 총잡이를 연기한 이스트우드를 향해 평론가들은 “연기를 귀찮아 하는 것 같다” “아무 연기도 안 하는 연기”라며 비아냥댔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면서 깊고 명상적인 작품들을 그가 연이어 연출하자 ‘건맨’ 시절 그의 연기는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한다’는 그의 미니멀리즘 연출 철학이 알고 보니 그의 연기에도 녹아 있었다면서 말이다.
감독은 멋진 동시에 무서운 자리다. 자신의 예술적 역량과 상상력의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하기를 내게 바라고 있다면, 바로 그때가 위기인 것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