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건강가계도를 아십니까]무시하기 쉬운 가족력 질환
열 살 때부터 두꺼운 안경을 썼던 초고도 근시 환자 박주원(가명·32) 씨. 그녀는 안경 때문에 외모에 콤플렉스를 느꼈을 뿐 건강상 큰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집안 식구 중에 실명된 사람이 여럿이었지만 ‘우리 집안은 눈이 나쁘다’는 정도로만 여겼다.
최근 그녀는 라식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실명을 부르는 질환 중 하나인 녹내장 증세가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초기라 꾸준히 약물 치료를 하면 실명은 피할 수 있는 상태였다.
○ 무시했다간 장애로 이어지는 가족력
흔히 가족력이라고 하면 암, 심장병 등 생명과 직결된 중증질환만 떠올리기 쉽다. 눈, 귀, 치아 등에 발생하는 간단한 질환까지 가족력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녹내장, 치주염, 중이염 등 가족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도 소홀히 여기는 질환이 있다. 처음엔 가벼운 염증으로 시작하더라도 방치하면 회복 불가능한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런 질환들은 정기검진 때도 정밀검사를 받지 않아 초기 치료 시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등한시하기 쉬운 가족력 질환 중 대표적인 예는 황반변성, 녹내장 등 눈 관련 질환이다. 황반변성은 안구에서 카메라 필름 역할을 하는 황반의 기능이 떨어져 사물이 왜곡돼 보이는 병이다. 녹내장은 안압이 상승해 시신경이 눌리거나 혈액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발생하는 질환이다. 두 질환 모두 병 진행이 느려 ‘침묵의 질환’으로 불릴 정도로 환자가 자각할 수 있는 증세가 거의 없다. 환자가 문제를 인지하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시신경이 손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홍영재 누네안과 원장은 “녹내장의 경우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 확률이 3∼4배 높아진다”며 “가족력이 있다면 30대부터 정밀 검진을 통해 발병 초기부터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기에 발견하면 약물로 안압을 조절하면서 시신경 손상을 억제해 실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뇌질환, 심장병 부르는 ‘가족 치주염’
이 같은 치주염, 충치 등 치과 질환도 가족력과 크게 관련이 있다. 서종진 연세대 치대 외래교수(CCL치과 대표원장)는 “노화와 상관없이 젊은 나이에도 발생하는 ‘급성치주염’은 유전 탓”이라면서 “부모에게 치주염이 있으면 거의 100% 동일한 질환이 대물림된다고 생각하고 치아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 치과 질환이라고 여겨 방치하면 뇌 질환, 심장병 등 중증 질환의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 원광대 의대 신경과 석승한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치아가 11개 이상 빠진 노인은 5개 미만으로 빠진 사람보다 뇌병변이 발생할 위험이 4.2배 높다. 이는 치아가 빠지는 주원인이 만성치주염이기 때문이다. 이 염증이 동맥경화를 일으켜 결국 혈관을 막아 뇌중풍(뇌졸중)이나 치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치아 수에 따라 노인의 치매 발병률도 차이가 난다. 치아가 11개 이상 빠진 사람은 5개 이하로 빠진 사람에 비해 인지기능 장애가 나타날 위험이 2.3배 높아진다. 또 구강 내 세균이 심장혈관 내벽에 염증을 유발해 심장병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보고도 있다. 서 교수는 “부모가 풍치나 치주염이 심하면 스케일링을 3개월에 한 번 정도로 꾸준히 하면서 예방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가족력 있으면 여성·남성질환 검진 앞당겨야
중년에 생식기 문제가 나타나면 ‘나이가 들어 기능이 떨어지나’ 하고 의심 없이 넘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생식기도 가족력의 영향을 받는 부위다. 여성의 경우 자궁근종, 남성은 전립샘 비대증이 이에 해당한다.
출산하지 않은 여성은 자궁근종에 경각심이 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국제역학회지에 발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환자 중 ‘윗세대에 가족력이 있고, 출산하지 않은 여성’의 자궁근종 비율이 2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가족력이 없는 미출산 여성과 발병 확률을 비교하면 3배 정도 높은 수치다.
전립샘 비대증도 가족력이 있다면 정기적인 검진으로 약물 치료가 가능한 발병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천진 강남제이비뇨기과 원장은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전립샘 비대증이 나타난 경우에는 발병 위험이 2배 이상 높아진다”며 “젊은 나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보다 10년 빠른 40대 때부터 정기적인 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박진수 인턴기자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