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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치를 준비하라던 盧… 중간평가 유보 뒤 “환영 건배를”

입력 | 2015-02-14 03:00:00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6〉노태우 중간평가 연기




1989년 7월 19일 열린 민주정의당 당직자 회의. 이틀 전 장관에 임명된 박철언 정무장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김영구 총재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 비서실장, 박 장관, 김윤환 원내총무, 손주환 기조실장.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이종찬 사무총장이다. 동아일보DB

청와대에서 무안을 당하고 돌아온 이후, 다시는 중간평가를 내 입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1988년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12월 8일, 느닷없이 청와대에서 나를 박준병 의원의 후임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겉으로 표시는 안 했지만 속으로는 중간평가에 대해 결심이 섰다는 신호로 인사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던 날, 노 대통령이 나에게 당부를 했다.

“이제 당을 장악하고 언제든 대사를 치를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주기 바라네.”

그날부터 나는 바빴다. 나는 중간평가가 그 다음해 2월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12월 25일 밤 9시에 노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지구당 위원장과 국회의원 연석회의를 소집해서 당이 일치단결하고 있다는 모습을 과시하도록 하시오. 특히 아직도 5공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발상을 전환해서 모두가 용광로에 들어가 한마음이 되도록 강조하시오. 이제 당원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소? 그런 운동을 나는 하기 바라오. 알겠지!!”

그런 강조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제 전투에 나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런데 12월 말경 박철언 청와대 정책담당보좌관이 “중간평가를 1월 중으로 생각해봤으나 아무래도 뒤로 미뤄야겠다”고 말했다.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우선 당 사무국 요원 교육 강화 계획부터 수립했다.

나는 여러 가지 유리한 데이터를 보며 자신을 갖고 대기하고 있었으나 청와대에서는 좀처럼 소식이 없었다. 답답했다. 이듬해 1월 말 나는 지구당 점검차 강원도 속초에 내려갔는데 기자들과 방담을 하면서 너무 앞질러 몇 가지를 말했다. “중간평가에 대하여 야당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있지만 우리 당의 자세는 분명하다. 중간평가는 신임을 걸고 하는 국민투표이고, 이는 야당과 협의할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청와대 측근들은 노 대통령에게 나의 ‘속초 발언’을 교묘하게 변질시켜 까바쳤다. “이종찬 사무총장이 중간평가를 계기로 당 조직을 자기 것으로 강화하려 한다”는 모략이었다. 노 대통령이 이 말을 듣고 대로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던 차에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청와대에서 별도의 중간평가 대책기구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불쾌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중간평가를 성공시키고 물러나겠다고 결심했다.

야당은 청와대가 중간평가를 피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야당은 이런 여당의 약점을 비집고 5공 청산과 특검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야당의 공세가 강화되자 노 대통령은 2월 23일 당정회의를 소집해 중간평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말에는 의지가 없었고 내가 듣기에도 엄포로 들렸다. 야당 들으라는 의도가 역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평가 강행 지시는 연극이었다.

3월 16일 당정회의가 궁정동에서 열렸다. 박세직 안기부장, 홍성철 비서실장, 박철언 보좌관, 최창윤 정무수석, 김윤환 원내총무, 이춘구 의원, 그리고 내가 멤버였다. 박철언과 최창윤은 노골적으로 중간평가 불가론을 강변했다. 둘이 짜고 나온 것 같았다. 이에 대해 박세직 안기부장은 “중간평가를 위해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사표까지 냈는데 이제 와서 방향을 틀면 정부 꼴은 무엇이 되겠느냐?”고 볼멘소리로 화를 냈다. 이춘구 의원도 “강행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격론이 벌어지자 홍 비서실장은 아직 연기하자는 건 아니고 그런 의견도 있다는 것이라고 무마했다.

다음 날 궁정동 조찬 당정회의에서 재차 격론이 벌어졌다. 그날 김윤환 총무는 야당과 타협 결과 5공 청산만 악속하면 연기도 가능하다면서 “잘하면 DJ의 평민당과 JP의 신민주공화당이 중간평가 연기 환영성명까지도 낼지 모른다”고 보고했다.

그날 오후 5시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 주재로 최종회의가 열렸다. 나는 연수원에서 지구당위원장, 국회의원 연석회의를 주관해야 하므로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이틀 뒤인 3월 19일 궁정동 회의에 나가보니 대세는 완전히 연기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도 더이상 강행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지쳤다. 질질 끌면서 전의(戰意)가 떨어져 설사 국민투표를 하더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런 판에 만약 내가 중간평가 강행을 계속 주장한다면 마치 이 정권이 망하기를 바라는 놈처럼 취급받게 될 것 아닌가?

오후 8시 청와대에서 회의가 또 소집됐다. 며칠간 토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중간평가 연기론’에 대해 내키지 않은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의 표정은 일순 밝아졌다.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3월 20일 전국지구당 위원장들의 청와대 오찬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 유보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오찬을 시작하면서 노 대통령은 하필이면 나에게 중간평가 유보를 환영하는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위하여! 위하여!”를 선창했다.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르는 채….  
▼ “중간평가 투표는 헌법위반” DJ 말에 무릎 친 노태우 ▼

중간평가 각오와 짜증 사이


국회 광주특위 1차 청문회가 열리고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증인’으로 출석한 1988년 11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그날 저녁 박철언 정책보좌관 부부를 청와대로 불렀다. 물론 박 보좌관의 외사촌 누님인 대통령부인 김옥숙 여사도 함께한 저녁자리였다.

“위기에 찬스가 있듯이 전두환 대통령 문제로 국민들이 불안해할 때 5공 비리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경제발전, 올림픽 성공 등은 우리 모두의 성취이며 우리 국민 모두의 자랑이다. 과거의 일로 혼란을 야기하고, 오늘의 질서를 파괴하며, 체제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한 뒤 “지금까지 한 것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내 복안(腹案)을 걸고 신임 투표를 하고, 안 되면 대통령 그만두겠다. 연내 어느 시기에 강하게 해결하고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박철언은 “신임투표를 하게 되면 나라가 안 됩니다. 앞으로는 정계 개편의 큰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전 대통령의 문제가 마무리되면 과감하게 개각도 하셔야 합니다”라고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노 대통령의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민들이 5공 악몽을 씻도록 ‘제2의 6·29 선언’ 같은 것이 필요하다. 급박, 절박한 계기를 잡아 모험하는 것이 옳다. 김대중 세력이 더 크기 전에 원내외의 좌익 세력과 손을 끊을지 김대중에게 물어보라. 나머지 보수 세력들이 모여 연합을 선언하고…. 이것이 큰 정치 아니겠나? 결론은 내각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체제 부정이냐 체제 수호냐가 관건이다.”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005년)에 나오는 얘기다. 이종찬 정무장관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노 대통령에게 중간평가 문제에 관한 ‘연내 결단’을 촉구하기 불과 사흘 전의 장면이다. 그런데 불과 사흘 뒤, 노 대통령은 이종찬의 재촉에 “자네는 왜 자꾸 나를 벼랑 끝으로만 몰고 가려고 하는가!”라며 짜증을 냈다고 했다.

상황과 기록을 종합해보면 박철언에게 했다는 말도, 이종찬에게 냈다는 짜증도 모두 노 대통령의 진심이었던 것 같다.

“나는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고 싶은 소망이 간절했다. 국민들이 흔히 ‘저거 빈말이지, 공약해 봤자 되겠나’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완전히 바꿔놓고 싶었다. 또 개인적으로는 대선 때 ‘3김 시대는 끝났다’고 이야기했던 만큼 중간평가를 통해 한 번 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노태우 회고록)

불안하지만 그런 소망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터에 ‘야심가’ 소리를 듣고 있는 참모(이종찬)가 거듭 채근하니 버럭 짜증을 냈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당시 노 대통령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또 흔들렸던 게 분명해 보인다. 5공 청산과 1노(盧)3김(金)의 여소야대는 정치9단도 헤쳐 나가기 어려운 미로(迷路)였다. 바로 그때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중간평가를 국민투표로 하는 건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라고 물었다. 노 대통령은 그 말에서 구원을 얻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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