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코리아 프로젝트 3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통일은 치유다]<上>천안함 유족 ‘5·24 해제’ 목소리
“두 아들 희생 헛되지 않길…” 천안함 용사 고 박석원 상사(왼쪽 아래)의 아버지 박병규 천안함46용사유족회장(왼쪽 위)과 고 이용상 하사(오른쪽 아래)의 아버지 이인옥 전 천안함46용사유족회장(오른쪽 위)이 1월 초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승적 차원의 남북관계를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북한이 진정성을 보인다면 5·24조치 해제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홍진환 jean@donga.com·최혁중 기자
이인옥 전 천안함46용사유족회장(53)을 경기 고양시의 일터에서 처음 만났던 1월 5일. 그는 전날 저녁에 아내와 함께 한참 울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으로 목숨을 잃은 이용상 하사의 아버지다.
○ “북한이 마음을 열고 나와 주길…”
“부모 심정 똑같아요. 자식은 가슴에 묻어요. 5년 전 그날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연연하는 것보다 국가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 고민해야 합니다. 이젠 아픔만 얘기할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는 분노와 슬픔에만 머물지 않겠다고 했다. 천안함 폭침 같은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천안함 폭침으로 인해 5·24조치가 돼 있죠. (그로 인해) 국익이 손상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국익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 회장에게 “국익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남북 대치가 평화적으로 풀려 국민생활이 안정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남북관계가 좋아져야겠죠. 정부는 평화적 문제 해결 노력을 해야 하고, 북한도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대화해야 해요. (남북대화를 얘기한) 김정은(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가 진심이기를 바랍니다. 거짓이라면 또다시 불신의 씨가 될 거예요.”
정부는 북한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5·24조치 해제가 가능하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이 전 회장은 “그게 전제돼야 남북 간에 신뢰가 쌓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 있는 조치’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했다. “김정은이 사과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태인 것 같아요. 사과를 하지 않아 우리가 한 발짝도 안 나가면 답보 상태가 돼버리니까….” 그는 “북한이 재발방지 약속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들 중에는 ‘북한 쳐다보기도 싫다’ ‘총만 있으면…’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남북관계가 좋게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많아요. 북한 동포도 결국 한민족이지 않습니까. 북한 주민들이 아니라 엉뚱한 짓을 한 김정일과 북한 권력에 분노했던 것이죠.” 그는 “천안함 폭침이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발전적인 길로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천안함 용사의 희생이 평화롭고 잘사는 나라의 밑거름 돼야”
그는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합니다. 평화와 화해무드로 가야 해요. 남북이 교류하는 과정에 세대도 바뀌고 그 과정에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통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된 동·서독이라고 왜 상처가 없었겠나. 쉽지 않지만 같은 민족이니까 치유해간 것”이라고 말했다.
5·24조치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5·24조치를 풀어 경제적으로 돕는 게) 남북관계에 도움이 된다면 정부가 (해제를) 고려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다만 그는 “그러려면 북한이 먼저 진정성을 보이고 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대해) 사과도 시인도 해본 적이 없잖아요. 정부가 재발방지 약속도 못 받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을) 도와줄 수가 없죠.” 그는 “(김정은이) 젊은 지도자니까 북한을 변화시키고 개방과 교류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지를 보여 달라”고 주문했다.
박 회장은 “똑똑하고 효자였던” 외동아들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두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
아들을 앗아간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정부가 못마땅하지 않을까. 그가 답변했다.
“성경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어요. 천안함 용사들의 희생이 평화롭고 잘사는 나라가 되는 밑거름이 돼야 합니다. 아들 일은 가슴 아프지만 남북이 교류 왕래하고 통일로 가 잘사는 나라가 돼야 아들도 기뻐할 겁니다. 나라의 안정, 발전, 대의를 위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옳다고 봐요.”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 이런 대승적 차원의 접근에 있지 않을까. 통일 준비가 분단의 아픔을 지닌 이들을 헤아리는 치유 과정을 숙제로 담아야 하는 이유다.
▼ 원로들이 조언하는 ‘5·24해법’ ▼
“인도적 지원 통해 北 대화테이블 유도… 국민적 합의 사전에 이루도록 노력을”
“비공개 대북접촉도 때론 필요… 결과는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를”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대해 책임 있는 조치를 내놓아야 5·24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는 원칙을 밝혀 왔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이명박 정부 시절 내걸었던 ‘사과, 재발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을 한꺼번에 다 받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정부는 “대화에 나오라”고 북측에 제기했지만 북한은 “대화하려면 5·24조치를 먼저 풀라”고 맞서고 있다.
서로 접점을 찾기 힘든 ‘치킨게임’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로 학자들은 “북한이 의지가 없다고 무작정 기다려서도 안 되지만 대화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며 “조급하지 않되 북한을 대화로 유도할 전략적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인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대북 인도적 지원의 폭을 확대하면서 남북관계를 관리해 북한이 대화로 나오게 해야 한다”며 “그런 과정을 통해 북한이 대화로 나왔을 때 논의할 5·24조치 해법과 관련해 국민적 합의(컨센서스)를 사전에 만드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적 지원은 5·24조치나 유엔의 대북제재를 우회할 카드”라며 “의료품과 영유아 대상의 이유식에서 민간단체의 소규모 쌀과 비료 등으로 지원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원로 학자는 “5·24조치를 해제하려면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라는) 명분이나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점, 이 두 가지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둘 다 없다”며 “3월 한미 연합훈련을 마친 뒤 국제정세를 보면서 대화의 기회를 엿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남북대화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비공개 대화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많았다.
2010년 5·24조치 선언 때 통일부 차관이던 엄종식 전 차관은 “한국 정부의 대북 요청 사항을 분명히 전하고 북한도 책임 있는 조치를 솔직하게 제시하도록 유도하려면 비공개 접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주현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경제분과위원장은 “대외에 공개하지 않는 정상적인 남북회담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5·24조치를 포함한 포괄적 결과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