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함민복 시인
“가족과 피붙이란 무엇인가. 서로에게 향긋한 냄새를 풍겨 주는 것만이 아닌, 시큰한 냄새가 나는 김칫국물 자국을 서로에게 남겨 주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형의 가슴에, 형은 내 가슴에 엎질러진 김칫국물이 아닌가. 어머니는 내게,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내게, 나는 아버지에게, 누나는…… 그래 시큰한 김칫국물들이 모여들어 딴 세상으로 떠난 김칫국물들을 그리워하는 명절이다.”(함민복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서)
설밑 함민복 시인(53)을 만나러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강화고려인삼센터에 갔다.
각박한 세상에도 시대의 욕망에서 한 걸음 물러서 살고 있는 그라면 지친 보통 사람들과 소외된 존재까지 품어주는 덕담을 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인삼 파는 일이 익숙해졌나요.
“아직 약간 쑥스러워서 ‘보고가세요’란 말이 잘 안 나옵니다. 한 번은 ‘보고가세요’ 하고선 어찌나 목소리가 작던지 스스로 ‘내한테도 잘 안 들리네’라고 했어요. 우리만 장사가 안 될 땐 다른 집과 비교돼 마음의 갈등이 올 때도 있어요. 그땐 우리가 먹고 살만큼만 팔 수 있으면 된다며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해요.”
―강화도 생활 20년인데 이곳 명절 풍경은 어떤가요.
“북을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에 갔는데 건물 후미진 곳에 노인 두 분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나눠 마시고 있어요. 강화도엔 황해도 연백평야에서 온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어요. 추석이면 모처럼 고향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개펄에 나가서 새까맣게 사람들이 많아요. 강화도 명절하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과 고향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어릴 적 설날을 어땠나요.
“쌀이 없어 싸라기 반말로 가래떡을 뽑아 떡국을 먹었죠. 거무튀튀하고 풀기가 없어 맛이 없어도 다들 그렇게 먹었어요. 설빔을 입고 집밖에 나가서 친구들끼리 옷에 주머니가 몇 개 달렸는지 서로 자랑하던 기억이 나요. 넉넉하지 않아도 행복했어요.”
―시인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가족이란 부끄러움,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몸처럼 부끄러움도 슬픔도 나눌 수 있죠. 사람이 만나면 어느 정도 경계가 있기 마련인데 경계 없이 서로 받아주는 존재가 가족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을 많이 썼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 많이 나겠어요.
“아흔 네 살 장모님이 어머니랑 동갑인데, 기력이 약해진 장모님을 뵈러 가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아내 형제들은 장모님께 잘해 드리는데, 저는 어머니께 못 해 드린 게 계속 생각나죠. 쓸쓸하게 사셨겠구나 하고요.”
―요즘 시는 언제 쓰나요.
“새벽 3시면 일어나 시를 쓰고, 오전 9시 인삼가게 문을 열죠. 장사 안 되면 도서관 가서 책보고. (웃음)”
―준비 중인 시집은 뭡니까.
“‘까’요.”
―예?
―세월호 배지를 옷에 달고 계신데, 지난해 우리 사회에 아픈 일이 참 많았어요.
“앞으로 가기 위해선 ‘백미러’를 봐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 마음속에 배 한 척이 들어와 있는데, 이 배들을 어떻게 편안하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평등 평화 존중을 생각해야죠.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 이정표가 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의 인삼가게에는 아내가 옮겨 적은 시인의 시 구절이 붙어 있다.
“이 우주에 헌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사랑일 겁니다.”
●함민복 시인은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1982년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하고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일했다. 글 쓰기 위해 퇴사 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1988년 등단했다. 시집 ‘우울氏의 一日’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미안한 마음’ 등 10여 권의 책을 냈다.
강화도=박훈상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