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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윤채근]설, 화해가 시작되는 틈

입력 | 2015-02-18 03:00:00

이전 한 해와 다음 한 해 사이 미세한 시간적 단절인 설
만날 수 없던 이들과 情나누고 닿을 수 없던 곳에 마음 주고
죽은 사람들과 해후를 한다
묵은해 보내고 맞는 새해 첫날 화해와 용서의 진지한 성찰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




윤채근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익숙한 동요의 한 구절이다. 까치의 설날과 우리의 설날은 왜 다른가? 설날이 이렇게 맘대로 바뀌어도 됐던 것일까?

사실 고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는 동지였다. 동지를 정점으로 낮이 차츰 길어지며 일조량과 더불어 생물의 활동량도 크게 늘어났다. 본격적인 생산과 노동의 계절이 가장 추운 이 시점으로부터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정확한 천문 관측에서 유래한 동지야말로 인류의 생존 주기율표에서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했고 동서를 막론하고 관련된 민속행사나 제의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세계적 민속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라는 저서에서 예수 탄생일의 기원이 12월 동짓날 제의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고대 왕조 주(周)의 설날은 아예 동지였다. 이에 비해 새해 첫날을 의미하는 정월 초하루는 사람들 정하기 나름이었다. 왕국이 교체되면 정월도 바뀌었고 새해 첫날도 새로 책정됐다. 새해 첫날은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문화 절기였던 셈이다.

로마의 황제나 중국의 천자는 무엇보다 달력을 반포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고정해 세계에 알림으로써 역사를 통제하는 자신의 권능을 입증했다. 정월 초하루, 황궁에는 한 해의 출발을 축하하고 황제로부터 새 달력을 하사받기 위한 사절들로 북적이곤 했다. 왜 달력이 그리 중요했을까? 달력이야말로 자연의 무질서에 문화의 빛을 비추는 행위, 우주가 인간 실존에 조응해 운행되고 있다는 물리적 징험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지가 한 해의 출발점이었다면 인류는 자연의 노예에 불과하지 않았겠는가? 동지로 대표되는 천문의 주기에 설날로 대표되는 인문의 주기가 합쳐질 때 비로소 자연의 일과 인간의 일이 대등해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설은 시간의 인본적 차원이었던 셈이다.

설은 문화적 시간의 개시 지점이었기에 자연적 시간과 다른 인간적 특징을 부여받게 되었다. 황제가 승인하기 전까지 설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은 황제와 신민의 문화적 합의를 통해서만 도래했다. 따라서 설은 설 직전과 직후를 나누는 칸막이 기능만을 자기 본질로 지녔고 당연히 자의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이전 한 해와 다음 한 해 사이의 미세한 시간적 단절이 바로 설이었다.

그렇다면 설 직전 시간이 멈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나간 사건들이 어떻게든 종료되고 삶이 새롭게 갱신되기 위해 일상의 작동이 잠시 정지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설은, 태양신 숭배로 대표될 종교 축제와 밀접히 결부된 동지와 달리, 보다 세속적인 축제의 모습을 띤다. 자고로 축제란 현실 질서가 잠시 멈추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동포와 이방인, 죽은 자와 산 자가 화해하는 의례의 시간이다. 의례 기간만큼은 시간이 멈추고 평화와 관용이 넘치게 된다. 권력의 빈틈인 선거 기간이 축제와 흡사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잠깐 펼쳐지는 단절의 자유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삶으로 변화할 기회를 잡는다. 관성에 떠밀려 살아낸 한 해를 털어버리고 무언가 다른 가능성을 타진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완전한 변신은 불가능하다. 과거가 우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 과거라는 유령을 곱게 매장하지 않으면 언제든 현실 속에서 재출현할 것이다. 그래서 성찰이 필요하다. 과거와 화해하고 묵은 원한을 용서로 풀어낼 진지한 성찰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

옛것을 전송하고 새것을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옛것 없이 새것 없듯 새롭지 않은 옛것은 새롭게 선포된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따라서 설 기간 잠시 멈춰 선 시간 속에 우리는 과거의 누군가를 애도하고 미래의 누군가를 영접한다. 애도해 떠나보내지 않으면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영접해 받아들이지 않으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이렇게 설 명절이란 과거와 미래가 초래할 위험을 주기적으로 해소하는 삶의 안전판이기도 했다. 적어도 한 해에 한 번, 우리는 설이라는 섬광과도 같은 시간의 틈을 통과하며 그러지 않았다면 잡을 수 없었을 사람들의 손을 잡고 온정을 나눈다. 닿을 수 없었던 곳에 마음을 주고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죽은 사람들과 해후한다. 단언하건대 틈이 없다면 화해도 없다. 원망과 원한에 사무쳤던 묵은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새해의 시작, 화해와 용서의 몫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

윤채근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