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베 강의 플로렌스’라고 불리는 독일 드레스덴(작센 주도) 엘베 강변의 성모마리아교회.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파괴됐다가 2005년 원래 모습으로 완벽하게 재건됐다. 드레스덴 그림엽서.
떻고. 그런데 고백하지만 이 엽서에 담긴 실제 모습을 기자도 아직은 보지 못했다. 내가 찾았던 1995년엔 2차대전 중 파괴된 잔해만 있어서다.
1945년 겨울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나치독일에 일격을 준비했다. 베를린 대공습이었다. D데이는 2월 13일. 영국에서 폭격기가 발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베를린 상공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다. 항로를 바꾸고 투하 목표도 수정했다. 드레스덴이었다. 이날 밤 드레스덴 시민은 지옥을 체험했다. 온 도시가 화염 속에 갇혔다. 폭격은 이틀간 계속됐다. 출격한 폭격기는 영국 722대, 미국 527대. 폭탄은 3900t에 달했다.
드레스덴은 18세기 바로크풍 건축물로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다. 그래서 200여 년간 ‘엘베 강의 플로렌스’라 불렸다. 플로렌스는 르네상스의 산실 피렌체(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영어 이름이다. 독일의 자동차메이커 폴크스바겐은 럭셔리 승용차 페이톤의 조립공장을 드레스덴에 두고 있다. 공장을 투명 유리의 친환경 작업공간으로 만들어 차량인도센터까지 겸해 활용하는 것도 드레스덴의 우아한 이미지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이다.
밸런타인데이였던 14일. 드레스덴(13일)은 공습 7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는 오전 1시경 이 교회에서 거행된 기념식을 케이블TV ‘독일의 소리(www.dw.de)’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행사는 촛불 네 개의 입장으로 시작됐다. 네 개의 촛불은 코벤트리(영국) 브로츠와프(폴란드)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그리고 드레스덴에서 전쟁중 숨진 희생자를 상징했다. 코벤트리에선 1940년 1000명가량이, 브로츠와프에선 5만 8000명(독일인 피란자 다수 포함)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872일의 포위 작전으로 러시아 시민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세 곳은 모두 드레스덴의 자매도시다.
드레스덴 공습 70주년 기념행사의 핵심, 그것은 추모와 반성, 화해였다. 당연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이제껏 몰랐던 사실 하나에 눈을 떴다.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의 연설에서다. 독일 정부가 드레스덴 공습의 자국민 피해자에게까지 사죄하는 자세였다. 참극의 가해자가 바로 독일 정부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때 카메라에 잡힌 한 노인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도발국 국민이란데서 오는 자괴감과 전쟁의 참화로 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등. 그건 ‘전쟁도발국 국민=전범’이란 인식을 갖고 있는 나(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새로웠다. 반성의 진정성을 느껴서다.
독일 대통령의 언급은 단호했다. “전대미문의 집단학살을 자행한 국가가 그 죗값도 치르지 않고, 또 어떤 상처도 없이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아니 그런 기대조차도 절대 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경고도 잊지 않았다. 희생자의 죽음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기도 수단이 돼서도 안 된다고. 1995∼2012년에 드레스덴을중심으로 발호했던 신나치 극우주의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들은 드레스덴 공습을 연합군에 의한 대량 학살로 몰아가며 나치 부흥을 획책하고 있다.
독일 대통령의 반성과 경고는 내게 ‘전범국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도 들렸다. 독일과 일본은 전범이 활개 치던 그때나 극우주의가 발호하는 지금이나 상황이 비슷하다. 1995년 종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할 당시만 해도 일본은 달랐다. ‘전쟁으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침략과 지배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으로 사죄한다’고 했으니. 그런데 지금은? 극우세력이 득세를 하며 담화를 수정하려고 애쓰고 있다. 평화헌법도 집단적 자위권 발동으로 의미가 퇴색했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