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도, 김 씨 자신도 이런 상속세를 낼 현금이 없다. 방법은 이 회사를 제3자에게 팔거나 아들에게 지분을 물려준 뒤 아들이 금쪽같은 회사 자산이나 주식을 팔아 막대한 상속세를 내도록 하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든 순탄한 가업 승계와는 거리가 멀다. 김 씨는 “일이 바쁘고 그동안 정신이 없어 후계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결국은 세금폭탄을 맞고 가업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며 “상속 공제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업승계제도가 너무 까다롭다”고 하소연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충실히 한몫을 했던 창업 1세대들이 경영 일선에서 속속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가업 승계가 중소기업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작년 말 가업 승계를 다소 수월하게 해주는 상속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이후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의 법제도나 사회 분위기에서 중소기업을 자녀에게 온전히 물려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장 엄청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건실한 기업이 갑자기 흔들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데다 사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찾는 것도 힘들다. 가업 승계를 ‘부(富)의 대물림’으로만 보는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 “상속세 내면 경영 흔들” 30년 흑자기업 스스로 문 닫아 ▼
상속세 피하려고 사업 줄이고 해외로 탈출
봉제인형 제조업체인 A사는 창립 이후 30년간 흑자 경영을 유지한 중견 기업이었다. 자체 테디베어 제품을 미국에서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했지만 2009년 창업주가 스스로 회사 문을 닫았다. 가업을 이을 자녀들이 승계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속세를 내면서 회사를 물려받자니 향후 경영에 차질이 생기고 심지어 부도 위험마저 있던 상황. 자녀 승계를 포기한 이 회사의 창업주는 전문경영인도 수소문해 보고 매각 절차도 알아봤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결국 30년간 일궈온 가업은 맥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현행 상속세법에 따르면 창업주가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인 기업을 자녀에게 물려줄 때 상속가액에서 최대 500억 원을 공제받을 수 있다. 하지만 피상속인(창업주)이 10년 이상 해당 기업을 경영해야 하고 상속인(자녀)도 상속 전에 2년 이상 가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또 자녀가 여럿이라도 한 명에게만 가업 재산을 몰아줘야 공제가 가능하다.
사후(事後) 관리 요건은 더 엄격하다. 상속 후 10년 동안 고용을 매년 기준 인원(상속 직전 2개연도 종업원 수의 평균)의 80%, 10년 평균으로 100%(중견 기업은 120%)를 유지해야 한다. 또 자산을 함부로 팔아도 안 되고 업종을 바꿔도 안 된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따라 기업이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 놓은 꼴이다.
이런 까다로운 규정은 실제 기업의 가업 승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0년 업력의 장식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B 씨는 수년 전부터 회사 경영에 참여해온 장녀를 후계자로 정하고 지분을 물려줄 계획을 세웠다. 딸은 급여소득밖에 없어 세금 납부를 위해서는 상속공제제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 다행히 기업 매출액, 상속인 경력 등 다른 조건들이 잘 맞아 공제 혜택을 받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속 후 10년 동안 업종을 바꾸면 안 된다는 규정이 B 씨의 발목을 잡았다. B 씨는 “10년이 지나기 전에 지금 하는 업종이 사양(斜陽)산업이 될 가능성이 큰데 사업 전환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라며 “공제 혜택을 받는 게 도리어 경영의 족쇄가 될 것 같아 상속 자체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 상속세 부담 선진국보다 훨씬 높아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재석 262명에 찬성 114표, 반대 108표, 기권 40표로 부결되고 있다. 개정안의 골자는 가업 승계에 대한 상속세 부담을 완화하는 내용이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2013년 말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업 상속·증여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기업이 ‘일시적인 경영난 발생’(30.0%)을 꼽았고 ‘사업 축소’(24.3%), ‘폐업이나 도산 초래’(11.0%) 등이 뒤를 이었다. 또 가업 승계의 주된 어려움으로 가장 많은 기업이 ‘상속·증여세 등 조세 부담’(71.7%)을 들었다.
한국경제연구원 정승영 선임연구원은 “국가 세수(稅收) 비중을 보면 상속세 및 증여세가 전체의 2%밖에 안 되는데 중소기업들은 상속세 부담 때문에 폐업까지 하는 상황”이라며 “이 때문에 중소기업 고용이 줄어들고 법인세가 덜 걷힌다면 현재의 세제를 개선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외국과 비교해도 국내 기업들의 상속세 부담은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한국은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26%의 두 배 수준이다. 또 한국과 비슷한 기업상속세 제도를 갖고 있는 독일 영국의 경우 세제 혜택을 받는 데 있어 기업 규모나 상속인 등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 아예 상속세를 폐지한 국가(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 등)나 세율이 낮은 자본이득세로 대체한 국가(캐나다 호주 스웨덴 등)도 많다.
이런 차이점을 이용해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본사를 아예 해외로 이전하는 중소기업도 있다. 매출액 7000억 원 규모의 한 중소기업은 최근 고민 끝에 회장의 아들 중 한 명이 상속세가 없는 캐나다로 이민 가는 방법을 택했다. 회사 사업을 캐나다 쪽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기업 전략을 선회한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면 세금을 내기 위해 상속받은 지분을 팔고 경영권은 고스란히 뺏기는 수밖에 없다. 국내 중견 종자업체인 농우바이오, 세계 1위 손톱깎이 메이커인 쓰리세븐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업 상속에 대한 기업인들의 고민이 깊어지다 보니 이들 중 상당수는 ‘편법 상속’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 해외이전하고 ‘땅굴파기’ 편법 승계… 稅收구멍 더 커져 ▼
지난해 12월 중소기업중앙회 주최로 경남 창원시에서 열린 ‘장수기업 희망포럼’에서 중소기업 경영자와 후계자들이 가업 상속 방법과 장수 기업의 성공 전략을 설명하는 전문가의 강의에 귀 기울이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제공
조 씨의 편법은 중소기업인들 사이에서 ‘모자 바꿔 쓰기’ ‘땅굴파기’ 등 다양한 은어(隱語)로 불린다. 겉으로는 티 안 나게 재산을 몰래 이전한다는 뜻이다. 특히 조 씨는 이 과정에서 바지 사장을 끼워 넣어 세무당국의 추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후계자 선정,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골치
가업 상속을 앞둔 중소기업의 고민은 세금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로 자기가 회사를 물려받겠다고 자녀들끼리 싸우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골치를 앓고 있다. 경영 실패의 위험을 안고 선대(先代)의 사업을 물려받느니 높은 학력을 이용해 안정된 직장에서 경력 쌓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상속을 바라보는 사회의 ‘삐딱한’ 시선도 극복해야 할 문제다. 지난해 말 상속세법 개정안이 부결된 데에도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 지원을 ‘세대간 부(富)의 무상 이전’으로 보는 비판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최근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오너 기업인들에 대한 사회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이 같은 여러 걸림돌 때문에 한국에서는 긴 세월을 견딘 장수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역사가 100년이 넘은 국내 기업은 동화약품 등 7개뿐이고 200년을 넘긴 기업은 하나도 없다.
반면 외국에서는 가족이 대를 이어 경영을 하면서 기업의 역사가 곧 ‘브랜드’가 된 명문 기업이 많다. 문을 연 지 200년이 넘는 기업만 해도 지난해 기준 57개국, 7212개사에 이른다. 일본이 3113개로 가장 많고 독일(1563개) 프랑스(331개) 등의 순이다.
이런 해외의 명문 장수 기업들은 후계자 선정에 가장 공을 들인다. 1668년 개업한 독일의 의약업체인 ‘머크’사는 15세부터 연령별로 후계자 양성 교육을 한다. 후계자와 관련한 의사 결정은 130명의 가족 주주로 구성된 총회와 이사회 등을 거친다. 업력이 약 130년에 이르는 중국의 소스 제조회사 ‘이금기’사는 오너 가족의 입사에 제한을 둔다. 대학 졸업 후 최소 3년간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일반 직원들처럼 입사시험도 거쳐야 한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장은 “가업을 승계할 시점이 되면 대부분의 기업은 성숙기에 접어들어 성장의 한계를 맞는데 이때 후계자가 기업을 이어받아 제2의 도약을 하지 못하면 쇠퇴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며 “가업 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기보다는 향후 기업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 달라는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곽도영·송충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