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조원 쏟아붓고 열매 없는 R&D]나랏돈 축내는 공공연구기관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R&D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데도 반복되는 초라한 성과는 ‘연구비 지원 대상으로 선정만 되면 그만’이라는 연구기관들의 안일함과 실패를 우려해 사업화를 외면하는 공공기관의 보신주의가 낳은 결과다. 이런 식으로는 정부 R&D 사업이 ‘국민의 세금만 먹는 하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논문 기술자’ 된 정부출연연구소
정부 R&D는 △정부가 연구 주제를 기획해 이를 연구기관에 위탁하는 하향식 지원 △연구기관들이 신청한 연구 주제들 중 일부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는 상향식 지원 △연구기관에 연구비를 먼저 주고 알아서 연구하도록 하는 총액지원 방식 등으로 추진된다.
이런 관(官) 주도의 R&D 지원 체계하에서 연구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건 논문 발표 건수다. 특히 미국의 톰슨로이터사가 개발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SCI’에 등재돼 있는 저명 저널에 몇 편의 논문을 실었는지가 연구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핵심 잣대다. 2011∼2013년 21개 공공기관의 박사들이 SCI급 저널을 포함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은 2595건이나 됐지만 이 중 사업화가 추진된 건수는 6.9%인 179건에 그쳤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것이다.
정부출연연구소가 논문 발표 건수에 집착하면서 연구 과제를 따내고, 논문을 작성하는 데만 능숙한 연구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민간의 부족한 연구 역량을 보완했던 출연연구소들이 최근에는 기초연구와 사업화 중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책연구원의 A 연구위원은 “논문 건수를 중시하다 보니 많이 알려진 주제를 토대로 쉽게 연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한 논문을 2, 3개로 쪼개 쓰는 부작용까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2013년 말 기준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한 R&D 사업의 특허 출원 건수 대비 우수 특허비율은 3.6%에 머물고 있다. 2012년 기준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R&D 생산성(투자비 대비 기술료 수입)은 2.89%로 미국(2010년 기준 10.73%)의 3분의 1 수준이다. R&D를 통해 기존 연구를 완전히 뛰어넘는 성과물을 만들어 내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기에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연구 성과보다 연구비에 관심
일례로 한국수력원자력은 2011년 10월 3억6000만 원짜리 용역과제를 미리 점찍어 둔 A대학에 주려고 편법을 동원하다 감사원에 적발됐다. A대학 이외에 용역제안서를 내는 곳이 없어 입찰 자체가 무산되려 하자 다른 대학 관계자에게 허위로 입찰에 참여토록 해 형식상 경쟁 입찰이 되도록 한 뒤 계획대로 A대학을 낙찰자로 정한 것이다.
정부 R&D 평가가 요식행위에 그치는 점도 문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0년부터 3년간 실시한 468건의 연구과제에 대해 대부분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미흡하다’는 평가는 한 건도 없었다. 다른 부처도 연구과제 평가에 대체로 관대했다. 연구과제가 현장에 적용되고 있는지 면밀히 검증하는 ‘실용화 수준 평가’를 실시한 부처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관련 연구가 사업으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배경에 창조적인 도전을 하다 실패해도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연구 풍토가 있다고 분석한다. 안전하지만 결론이 뻔한 연구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다소 위험해도 상식을 뒤집는 연구에 도전하고 기초연구와 사업수요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중간자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논문 편수보다 질을 중시하도록 연구과제 선정 기준을 바꿔야 할 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업종에 R&D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