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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뒤가 더 외로워”… 찾아뵈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입력 | 2015-02-23 03:00:00

일부 어르신들 명절증후군




20년 전 외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살고 있는 천순자(가명·89) 할머니. 설 연휴 내내 부산의 천 할머니 집 전화벨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이미 환갑이 지난 네 딸은 명절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적적한 마음에 손자 손녀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숫자를 못 읽는 천 할머니는 직접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찾아오는 노인돌봄이의 도움도 명절에는 받을 수 없다. 결국 설 연휴 동안 천 할머니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천 할머니는 “내가 얼른 죽어야 한다”고 혼잣말을 되풀이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명절이 괴로운 노인이 늘고 있다. 가족 친지가 모여 웃음꽃이 피는 명절 연휴가 일부 노년층에게는 깊은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위기의 시간’이 되고 있다. 극심한 우울증은 극단적인 선택을 부르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천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노년층을 자살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으로 꼽는다.

실제로 이번 설 연휴 기간 전국에서 신변을 비관한 노년층의 자살이 잇따랐다. 22일에는 서울 용산구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양모 씨(89)가 목을 매 숨졌다. 양 씨는 60년을 해로한 부인과 2년 전 사별한 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9일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김모 씨(91·여)가 5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찰은 “김 씨가 최근 피부 질환 때문에 경로당 출입을 삼가 달라는 말을 듣고 크게 낙담해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설 다음 날인 20일 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한 주택에서 남모 씨(69)가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부인 이모 씨(66)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남 씨는 설날인 19일 딸과 말다툼을 벌였고 이후 딸은 아버지를 남겨둔 채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전문가들은 명절 직후 노년층의 우울증 관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평소 자식과의 묻어둔 갈등이 명절을 계기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지낸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은 “명절이 지나면 ‘왜 이 나이를 먹도록 안 죽고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며 자식에게 서운한 심정을 털어놓는 노인이 유달리 많다”고 말했다.

홀몸노인 등 소외된 노년층의 증가도 노인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명절이 되면 친구나 이웃 등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8년부터 5년간 명절 연휴 다음 날 자살자 수(41.5명)는 명절 연휴 기간 하루 평균 자살자 수(29.1명)를 크게 웃돌았다. ‘명절 스트레스’에서 노년층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인구 10만 명당 노인(만 65세 이상) 자살자 수’는 81.9명으로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일본(17.9명)의 4배가 넘었다. 또 70세 이상 노인의 자살 시도는 2010년 224건에서 2013년 397건으로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이재헌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영화 ‘국제시장’ 열풍에서 보듯 노년층에게 중요한 것은 자랑스러운 과거다. 인생의 가장 멋진 순간들을 추억하며 노인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화를 자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