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처음 가족과 설명절 함께 보냈죠”
○ “남 탓하는 건 내가 못 봐준다”
허재가 미국 연수 도중 귀국해 KCC 감독을 맡은 것은 꼭 10년 전인 2005년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할 동안 우승 2회, 준우승 1회의 성적을 거두며 스타 출신 지도자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1997년 출범한 프로농구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 건 그가 최초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마음을 비웠던 것 같다. 늘 세상의 중심에 있던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KT 전창진 감독도 합석했다. 둘은 초등학교와 중고교 2년 선후배로 친형제 같은 사이. 전 감독 역시 성적에 따른 마음고생 끝에 최근 급성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고독한 승부사들의 애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허웅, 허훈의 아빠로 불렸으면…”
강한 카리스마로 유명한 허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다. 연봉 계약을 할 때도 조건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용산고 동문 관계로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 온 구단 오너의 높은 신뢰를 받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홀연히 떠날 결정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허재와 ‘실과 바늘’로 불리는 한 농구인은 “거취와 관련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했다”고 전했다. 허재는 “내가 빨리 떠나야 뒤를 이어 감독이 될 추승균 코치도 경험을 쌓을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비록 그만둬도 여전히 팀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허재의 두 아들은 모두 농구 선수다. 장남 웅은 동부에서 신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막내 훈은 연세대 주전 가드. 아직은 ‘허재의 아들’로 불리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얘기를 자주 들을 만큼 비범한 실력을 지녔다. 언젠가 평소에도 통화가 쉽지 않던 허재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다. 동아일보에 두 아들 기사가 실린 날이다. “고맙다. 언젠가 내가 허웅, 허훈의 아빠로 불리면 좋겠다.” 강한 남자로만 보였던 허재에게서 깊은 부성애를 확인한 적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있었다. 두 아들에게 늘 자랑스러운 농구 선배이자 아버지가 되려 했던 그의 모습도 사퇴와 무관하지 않았다.
야인으로 돌아간 허재의 자택은 N서울타워가 보이는 서울 중구에 있다. 그는 “앞으론 남산에서 운동 좀 해야겠다”고 했다. 남산은 허재가 중고교 시절 틈만 나면 뛰어다니며 꿈을 키우던 곳이다. 체력을 기르려고 매일 밤 10km 언덕길을 내달리기도 했다. 허재가 초심으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사저(私邸)’일 것 같다. 선수 시절 경기 도중 손가락이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도 코트를 지켰던 허재 아닌가. 그런 투혼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가 툭툭 털고 일어나 백코트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