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톨스토이의 대하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알지만 발레는 잘 모르셨다고요? 이번에 본 작품은 생존 러시아 작곡 거장 셰드린의 음악에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2004년 안무한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이 작품도 멋졌지만, 저는 공연을 보면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보리스 예이프만이 안무한 2005년 작품 ‘안나 카레니나’가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물론 차이콥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스토리에 맞춰 발레곡을 쓰지 않았습니다. 교향곡 ‘만프레드’, ‘햄릿’ 서곡, 교향곡 6번 ‘비창’을 비롯한 차이콥스키의 명선율들을 편집한 발레입니다.
‘비창’은 알아도 ‘만프레드’ 교향곡이나 ‘햄릿’ 서곡은 많은 분들에게 생소할 겁니다. ‘만프레드’는 영국 문호 바이런의 시를 교향곡으로 만든 작품이고,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쓴 관현악곡입니다. 그런데 ‘만프레드’의 3년 뒤 ‘햄릿’을 작곡하면서 차이콥스키는 노트에 ‘만프레드처럼 들리지 않게’라고 써두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햄릿’과 ‘만프레드’의 분위기는 많이 비슷합니다. 그럴 만합니다.
차이콥스키 자신도 음악사상 가장 심한 자기 회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의 편지와 일기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재능이 없다” “지루하다” “가치 없다”는 가혹한 평가가 가득합니다. 결국 ‘만프레드’와 ‘햄릿’ 모두 차이콥스키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심각한 자기 회의와 자기혐오는 그를 이끌어가는 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형편없이 게으르니까 스스로를 얽어매야 한다”며 매일의 작업시간표를 만들어 작곡시간을 강제했고, 그 결과 수많은 멋진 작품이 탄생했으니까요.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영혼을 피폐해질 정도로 죄어 인류에게 풍성한 선물을 주었다고 할까요.
유윤종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