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영준 도미노 매거진 동인
1988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된 뒤 나라 전체에서 일어난 열병은 ‘88’이라는 숫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울 변두리에서 소시민의 자식으로 살던 내게도 88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였다. 물론 서울뿐이 아니었다. 대구와 전남 담양을 잇는 고속도로에도, 한강 이남에 뚫린 강변 도심 고속화도로에도 한국인은 88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중국인이 8이라는 숫자를 워낙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도 당시 한국인의 88 사랑은 거기에 비할 바 아니었던 듯싶다.
88은 한국 경제의 마지막 단계를 상징하는 숫자였다. 그 숫자에는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조국을 완성하겠노라는 결의가 묻어 있었다. ‘평화, 조화, 전진’ ‘한강의 기적’, 그리고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와 같은 표어가 선사하는 한국인의 열망이 모조리 숫자 88에 압축됐다. 그러므로 서울 올림픽은 자랑스러운 것 뒤로 지저분한 것을 감추는 신혼집 집들이처럼 구성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손님맞이의 대의를 위해 승용차 짝·홀수제를 강제 시행하고, 대표 가수로 조용필 대신 교포 출신 코리아나를 선발했다. 도시 환경을 개선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철거민의 인권을 유린한 부끄러운 과거는 누가 볼세라 감춰졌다.
이후 ‘3포 세대’ 등의 세대 규정이 이어졌지만 20대 젊은이의 어두운 미래를 처음으로 직시하게 했던 용어는 88만 원 세대였다. 그러나 숫자 88이 갖는 선정성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언론은 때가 되면 88만 원 세대라는 용어를 통해 현재의 청춘이 얼마나 불쌍하게 살고 있는지 묘사하기에 바빴다. 그래도 꿈을 찾아 나가는 20대를 다독이기 위해, 진정성 등의 용어가 남발됐다. 인문학 멘토라는 새로운 직종이 활개를 쳤다.
‘88’은 20년 새 한국 사회의 희망을 상징하는 숫자에서 절망의 표식으로 둔갑했다. 과연 그 2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공산주의의 붕괴로 시작된 1990년대는 88이 가져다준 희망의 열매가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문화적으로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토토가’의 무대로 상징되는 팽창의 시대였으며 경제적으로는 3저 호황을 발판으로 갓 직장인이 된 386 세대들이 신도시 아파트 분양을 중심으로 자산을 불릴 수 있는 기회를 얻던 중산층 팽창의 시대였다.
2000년대에는 좀 더 진보적인 사회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현실 정치를 통해 구체화됐고 월드컵으로 분출된 광장의 에너지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설움을 달래주었으며 몇 년 동안 기록적인 시세 차익이 지속된 부동산 시장이 있었다.
이 모순과 갈등에서 조금 비켜 서 있는 30대 후반으로서, 나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주체였던 세대에게 묻고 싶다. 두 개의 ‘88’이 만드는 선분은 왜 이리도 가파르냐고. 파티 같았던 20년을 관통하고 나니, 남은 것은 숙취와 빈 병뿐이냐고.
함영준 도미노 매거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