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사과
-김혜순(1955~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자전거와 정미소 방아와 유모차, 바퀴 달린 것들은 제 길을 따라 돌고 돌 테다. 나락이든 인생이든 빻고 깎아내면서, ‘둥글게 둥글게’, 그렇게 생은 돌아간다. 계절의 바퀴도 돌아 ‘잘 익은 사과’의 계절. ‘구멍가게 노망 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어쩌면 ‘처녀 엄마’가 딸이고 먼 나라로 입양 간 아기는 ‘손자’일 수도 있는 할머니……. 이렇게도 잘 익은 사과 한 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