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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경주도심 신라고분, 1500년의 비밀

입력 | 2015-02-25 03:00:00


천마총 내부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들을 조만간 재발굴할 것이라고 합니다. 서봉총(瑞鳳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등 일제강점기 때 발굴했던 고분들이 재발굴 대상이라고 하네요. 이들 고분은 1920년대 일제가 발굴했지만 부실 조사로 인해 발굴자료나 보고서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좀 더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제대로 된 보고서를 남겨놓는 것이 재발굴의 목적인 셈입니다.

천마총 단면도

○ 고분의 도시, 경주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에는 무수히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을 꼽으라면 단연 고분입니다. 경주 도심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동산 같은 거대한 고분들을 만날 수 있지요. 그래서 경주를 두고 “고분의 도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도심 한복판 일상의 공간에 죽은 자의 무덤이 즐비하다니. 세계 어느 도시를 다녀보아도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커다란 무덤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경주 지역 고분 발굴은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보문리 부부총(夫婦塚), 1921년 금관총(金冠塚),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등을 발굴했습니다.

광복 이후엔 우리의 손으로 고분 발굴이 이뤄졌습니다. 1946년 호우총(壺우塚) 발굴, 1973년 천마총(天馬塚) 발굴, 1973~75년 황남대총(皇南大塚) 발굴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각각 1만1000여 점, 5만8000여 점의 진귀한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 고분 이름 붙이기

발굴을 통해 주인공의 신원이 밝혀지면 그 주인공의 이름을 따 고분 이름을 정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경주 도심에 있는 5, 6세기 신라 대형 고분들은 아직까지 주인공이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대신 대표적인 출토 유물을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금관총, 금관에 금령(금방울)이 붙어 있다고 해서 금령총, 천마도(天馬圖)가 나왔다고 해서 천마총과 같이 이름 붙인 것이지요.

서봉총은 사연이 좀 독특합니다. 1926년 발굴 당시, 한국을 방문한 스웨덴의 왕자 구스타프가 발굴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이를 기념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瑞) 자를 따고, 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과 비슷한 새가 장식되어 있다고 해서 봉(鳳) 자를 따 서봉총이라고 했습니다.

천마총의 경우엔 논란도 있었습니다. 1974년 발굴단과 학계는 그때까지 155호분으로 불리던 무덤을 발굴한 결과, 대표 출토품인 천마도를 내세워 천마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금관도 매우 중요한 유물이었지만 금관총이란 이름이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천마도를 내세운 것이었지요.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천마총으로 이름을 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경주 지역의 경주 김씨 문중이 반발하고 나선 겁니다. “경주 지역의 대형 고분은 거의 틀림없이 신라 왕실, 즉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무덤인데, 왜 하필이면 말의 무덤으로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반발이었습니다. 경주 김씨 문중은 그후 천마총의 이름을 바꿔 달라고 국회에 청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 1500년 동안 도굴되지 않은 까닭

경주 지역의 5, 6세기 대형 고분에서 이렇게 황금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무덤이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고분들의 대부분이 도굴되었는데 유독 경주에 있는 5, 6세기 대형 고분만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비밀은 바로 이들 무덤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드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먼저 시신을 넣은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궤를 안치합니다. 이어 목관과 궤를 둘러싸는 목곽(덧널)을 설치합니다. 그러곤 그 위를 돌로 촘촘히 쌓고 다시 흙으로 둥글게 봉분(封墳)을 다져 마무리합니다.

도굴꾼들은 주로 고분의 바깥 아래쪽에 한 사람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리로 들어가 관 속에 있는 유물을 훔쳐 가지요. 그런데 돌무지덧널무덤은 애초부터 그게 불가능합니다. 구멍을 뚫다 보면 관 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돌의 일부를 빼내야 합니다. 하지만 돌을 빼내다 보면 그 위에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돌들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겠지요. 도굴꾼들은 그 자리에서 돌 더미에 깔려 버릴 겁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5, 6세기 신라에서만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저 엄청난 황금 유물을 영원히 지켜내기 위해 5, 6세기 신라 사람들이 돌무지덧널무덤을 고안한 것은 아닌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