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소설가
“네가 앞장서!”
영호 씨는 거실 소파에 죄인처럼 앉아 있던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고등학교 일학년인 그의 아들은 고개를 잔뜩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니 영호 씨는 더 부아가 치밀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들은 친구와 만나 광역시행 버스를 타러 가던 중 거리에서 학교 선배 네 명을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좀 ‘논다고’ 소문 난 그 선배들은, 아들과 친구에게 대뜸 돈을 좀 꿔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은 무섭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가진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선배들은 아들과 아들 친구에게 자기들 대신 저쪽 골목길 끝에 사는 여자아이한테 쪽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인데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뭐 그 정도쯤이야 하면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따라 온 선배들이 돌변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차마 아들의 멱살을 잡지 못했던 선배들은, 인적 뜸한 골목길에 이르자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쩌려고요?”
“어쩌긴? 내 이놈의 자식들, 콩밥을 먹이고 말 거야!”
경찰서에 도착해 평소 알고 지내던 최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한 지 두 시간 만에 사거리 PC방에 있던 아들의 선배 네 명이 줄줄이 경찰서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아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바들바들 다리를 떨었다. 영호 씨는 그런 아들의 허벅지를 꽉 잡아 주었다. 선배 아이들이 끌려 들어온 지 한 시간쯤 지난 뒤엔,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하나 둘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이게 누구야? 김 과장 아니야? 야, 이거 김 과장을 여기서 다 보네.”
선배 아이의 아버지 한 명이 영호 씨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영호 씨도 잘 아는 시내 ‘홍묘종업사’ 박 사장이었다. 영호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 사장과 악수를 했다.
“그날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체기가 있어 가지고…. 말도 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근데 쟤가 김 과장 아들이었어?”
“아, 네… 아, 그럼 쟤가 박 사장님 아들이었어요?”
영호 씨와 박 사장은 최 형사 앞에 나란히 앉으면서 말했다. 박 사장은 최 형사에게도 ‘지난번 보일러 고친 거 잘 돌아가지?’라고 물었다. 다른 선배 아이들 아버지도 박 사장과 영호 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명은 영호 씨와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던 동사무소 계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시내 추어탕집 사장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안면이 전혀 없었지만 박 사장과는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영호 씨와 그들은 최 형사 앞에 앉아 다가올 농협 조합장 선거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 형사가 물었다.
“근데, 애들 건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때까지 계속 서로 말을 주고받던 영호 씨와 다른 아버지들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영호 씨가 먼저 툭 말을 꺼냈다.
“애들끼리 싸운 걸 갖고 뭘요. 지역사회에서 그런 일로 얼굴 붉히면 되나요?”
영호 씨가 그렇게 말하자, 박 사장이 ‘그럼, 애들 땐 원래 다 그렇게 크는 법인데, 뭘. 우린 땐 안 그랬나?’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영호 씨도, 다른 아버지들도 따라 웃었다.
영호 씨의 아들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멀뚱멀뚱, 서서히 판다 눈으로 변해가는 눈두덩을 어루만지면서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