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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꿈과 끼’의 현주소

입력 | 2015-02-25 03:00:00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설을 맞아 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이니 사촌들과 놀 수 있게 된 아이들도 신이 났다. 양가를 오가며 열두 살 큰형님부터 두 살 막내둥이에 이르는 9명의 아이들을 찬찬히 지켜보노라니 새삼 인간이라는 존재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아를 좋아하는 아홉 살 조카는 피겨스케이팅에 이어 리듬체조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놀라운 유연성을 뽐냈다. 곤충을 좋아하는 다섯 살 조카는 사슴벌레의 애벌레를 키우는 데 심취해 있었다. 제법 말문이 트인 세 살 조카는 동물 책을 무척 좋아했다. 고래, 상어, 토끼 책은 하루 종일 끼고 보면서 꽃게 책은 질색을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는 속담처럼 그 작고 어린 아이들도 성격과 취향이 제각각이었다. 누가 가르치거나 유도하지 않아도 타고난 개성에 따라 좋아하는 것을 찾고 즐기는 모습이 신통했다.

우르르 뛰어다니며 깔깔대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어른들의 대화 주제는 자연히 교육 문제로 흘렀다. 영어는 언제부터 시킬 것인지, 학군이 좋은 동네의 집값 동향은 어떤지, 대학 입시에 어떤 고등학교가 유리한지, 제주도 국제학교에 아이를 보낸 지인의 이야기 등 교육 관련 얘깃거리는 끝이 없었다.

모인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거나 입학 전이라서 그런지 특히 초등학교 대비에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다. “요즘 초등학교에서 두각을 보이려면 미술, 줄넘기 과외는 기본이고 음치 교정도 받아야 한다더라”라는 얘기가 나오자,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미리 영어, 한자, 피아노, 미술, 수영의 ‘취학 전 5종 세트’를 끝내고 입학시키더라”라는 말도 이어졌다. 아이들의 진로를 빨리 찾아주는 것도 유능한 부모의 덕목이 된지라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시켜 보는 게 요즘 트렌드라고 했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모습을 떠올리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부모 세대의 학창 시절에 비하면 교과 학습 부담도 커진 마당에 섭렵해야 할 비교과까지 무궁무진으로 늘어나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저마다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만능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아이도, 또 그 사교육 대열을 외면할 수 없는 부모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슈퍼맨을 만들어도 요즘 아이들이 더 뛰어나거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 주위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성적, 주먹, 게임 실력에 따라 교실 안의 서열이 정해지고, 이도 저도 아닌 아이들은 존재감이 없어진다고 한다. EBS가 지난해 전국 초등학생 1072명의 일상을 관찰해 만든 다큐프라임 ‘초등성장보고서’에 따르면 9.4%는 교실에서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느껴진다고 답했고, 이 중 20%는 존재감이 없는 것이 괴로워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아동 전문가들은 과잉 투입, 그리고 즉각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학부모들의 조바심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입을 모은다. 자녀 교육에서조차 투자수익률(ROI)을 따지는 풍조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조기 교육 열풍은 도무지 식을 줄 모르고, 남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점점 더 커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무작정 따라가려고 하다가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을 만들 수도 있다. 부모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스려 가며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집중해서 즐길 수 있도록 여유를 주면 어떨까.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꿈과 끼’ 교육은 학교가 아닌 학부모부터 단련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