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화자는 자전거를 타고 고향마을을 고샅고샅 도는 중이다. 때는 추수가 끝난 가을. 길가 풀숲에서는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들리고, 정미소 앞에는 ‘실려 온 나락들’이 쌓여 있다. ‘치르르치르르’, 화자가 탄 자전거 바퀴 도는 소리가 읍내의 한적함에 정밀한 고요를 더한다. ‘보랏빛 가을 찬바람’, 초연한, 달리 말하면 냉혹하고 무심한 ‘보랏빛’으로 ‘가을 찬바람’의 차가움을 뚜렷하게 형상화했다. 시각적 이미지인 색채로 몸과 마음의 소슬함이라는 체감을 구체화한 감각적 표현이다. 모처럼 고향마을에서 한가하게 자전거를 타면서 화자는 왜 마음이 소슬한 걸까. 보랏빛은 멍의 빛깔이기도 하지.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느닷없는 듯한 이 구절에 답이 있을 테다. 화자는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해외 입양아를 보았던 거다. 그때 받은 슬프고 미안하고 안타깝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던 충격을 지울 수 없는 거다. 그래서 하늘에 정처 없이 떠도는 한 조각 작은 구름이 그 아기를 떠오르게 했던 거다.
자전거와 정미소 방아와 유모차, 바퀴 달린 것들은 제 길을 따라 돌고 돌 테다. 나락이든 인생이든 빻고 깎아내면서, ‘둥글게 둥글게’, 그렇게 생은 돌아간다. 계절의 바퀴도 돌아 ‘잘 익은 사과’의 계절. ‘구멍가게 노망 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어쩌면 ‘처녀 엄마’가 딸이고 먼 나라로 입양 간 아기는 ‘손자’일 수도 있는 할머니…. 이렇게도 잘 익은 사과 한 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