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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줄었지만 ‘은따’는 더 심해져… 교묘해진 학교폭력

입력 | 2015-02-26 03:00:00

[학교 가기 겁나는 아이들/학교폭력 실상은]청소년폭력예방재단 실태 조사




늘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예쁜 학용품을 나눠 쓰고 만화영화 얘기를 하며 ‘까르르’ 웃던 사이였다. 문제는 정말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A 양(11)은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눈사람 캐릭터 ‘올라프’를 그렸다. 이 그림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이 함께 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친구 B 양(11)이 ‘올라프를 욕되게 했다’며 장난처럼 적었다. 그러자 SNS 속 모든 친구가 A 양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따돌림은 은밀하고 교묘했다. A 양의 외모를 강아지 ‘시추’라고 표현하며 SNS에 ‘시추는 더럽고 못생겼다’ ‘시추는 다른 강아지들 사이에서 왕따’라고 은유적인 글을 올리며 따돌렸다. 급기야 같은 반 친구들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A 양이 건넨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얼굴만 쳐다보며 킥킥거렸다. 카카오스토리의 ‘필독’(게시글을 특정인이 꼭 보게 하는 것) 기능까지 괴롭힘의 수단으로 동원됐다.

1995년부터 학교폭력 근절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이 지난해 1월 파악한 한 초등학교의 사례다. 겉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은 점차 감소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은밀한 괴롭힘은 줄지 않고 있다. 특히 교사나 성인이 접근하기 힘든 폐쇄된 사이버 공간의 실태는 심각하다. 피해자를 직접 지칭하지 않고 또래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따돌리거나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A 양의 경우에도 학교 측은 “온라인의 글이 A양을 대상으로 했다는 정황을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며 정식 조사를 피했다.

이런 현상은 동아일보가 입수한 청예단의 ‘2014년 전국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조사는 전국 17개 시도의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5958명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 지난 1년간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학생의 비율은 2013년 6.1%에서 지난해 3.8%로 줄어들었다. 2011년 18.3%를 기록했던 수치가 3년 만에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 하지만 청예단 측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따돌림이나 언어폭력을 미처 학교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왕따’보다 은근히 따돌린다는 뜻의 ‘은따’라는 표현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피해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큰 것으로 나타나는 상황이다.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여전히 크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다’거나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학생의 비율은 2012년 49.3%, 2013년 56.1%, 지난해 50.0%로 꾸준히 높은 수준이다. 학교폭력 피해 후에 자살을 생각한 학생 역시 2013년 42.1%, 지난해 42.9%로 집계됐다. 학교폭력 피해 때문에 ‘복수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는 학생은 2013년 75.4%에서 지난해 77.0%로 늘어났다.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교폭력의 양은 줄어들고 있지만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 대신에 관계를 끊어버리는 등 다른 방식으로 괴롭힌다고 피해자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통계상으로도 누군가를 제외하고 카카오톡 방을 만들거나 초대하고서 말을 걸지 않는 등 사이버상의 괴롭힘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개인의 신상정보나 사진 등을 고의로 온라인에 유포하는 비율이 2013년 4.6%에서 지난해 9.3%로 크게 늘어났다.

김은희 진로&심리상담연구소장은 “모바일 발전으로 학교폭력이 예전과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며 “아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은 더욱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학교폭력 유형 중에서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은 사이버 폭력 항목이 같은 기간 6.1%에서 7.6%로 증가했다. 사이버 폭력 피해율이 가장 높은 학년은 중학교 3학년(13.6%)과 중학교 2학년(9.7%)으로 나타났다. 또 피해 공간은 카카오톡을 비롯한 모바일 메신저(44.1%)와 SNS(38.3%) 순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흐름에 발맞춘 학교폭력 예방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성열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신고 체계 구축 등이 근본적인 학교폭력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사이버 따돌림 등 새로운 방식의 폭력도 피해자에게 큰 고통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꾸준히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나만 아니면 돼” 절반이 모른 척 ▼

반에서 힘깨나 쓰는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지욱이(가명·15)를 괴롭혔다. 스마트폰을 빼앗아 게임을 하고, 권투 연습을 한다며 지욱이를 세워놓고 쉭쉭 소리를 내며 얼굴과 배에 주먹을 들이댔다. 말투가 어눌하고 살이 찐 편인 지욱이는 학기 초부터 반 아이들의 ‘만만한 상대’였다.

지욱이 앞자리에 앉은 오예지(가명·15) 양은 이를 모두 목격했다. 긴장한 지욱이를 보면서 웃는 소리,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지욱이가 내뱉는 깊은 한숨소리까지 생생했다. “안됐죠. 볼 때마다 불쌍해요”라고 말하면서도 예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당하는 걸 알지만 쉬는 시간엔 친구와 매점에서 수다 떨고, 졸리면 엎드려 잤다.

“왜 가만히 있었냐고요? 저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반 애들 다 그랬어요.”

예지가 유별난 게 아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조사 결과 학교폭력을 목격한 학생 중 절반 가까이(46.9%)는 “모른 척했다”고 답했다. 학교 선생님께 알린다는 응답은 다섯 명 중 한 명(19.1%)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학교폭력을 보고도 방관한 이유로 ‘관심이 없어서’(26.8%), ‘도와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23.3%), ‘같이 피해를 당할까 봐’(22.1%)라고 응답했다.

“일단 그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지욱이가 나쁜 애는 아니지만 나랑 친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을 꼽으며 방관 이유를 설명하던 예지는 “그리고 내가 도울 수도 없다”고 말했다. 망설이다 “그 패거리(가해 학생들)가 나쁘긴 하지만 그들과 등져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지욱이가 아니면 다른 애가 겪어야 할 텐데…”라며 속내도 내비쳤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을 목격했을 때 학생이 나서서 말리는 것보다 선생님이나 경찰 등에 먼저 알리라고 지적한다. 어설프게 돕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피해 학생이 모멸감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이 학교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교사나 경찰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적극적으로 나서는 학생이 적다는 점이 문제다. 학교에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했지만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가해자가 기세등등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보자를 찾아내는 일이 적지 않은 탓이다.

방관만 하다가는 되레 ‘동조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은숙 연 심리클리닉 원장은 “싸움을 구경만 했는데도 가해자로 신고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폭력을 무시하는 태도도 폭력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학생들이 학교폭력을 보고 적극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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