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제일 맛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싼 커피를 코와 혀끝이 알아본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 주변만 봐도 언젠가부터 유명 브랜드 커피숍 수십 개가 생겨났다. 그렇게 많은데도 점심시간이면 길게 줄을 서야 한다. 반면 담배는 피울 곳도, 피우는 사람도 줄었다. 남북 사이 공통점을 느꼈던 ‘한 대 물고 한담’ 문화는 어느덧 ‘한 잔 들고 한담’ 문화로 바뀐 지 오래다.
최근 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빠르게 바뀌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것 같다. 평양에서도 이젠 커피가 더이상 귀한 음료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아직 지방엔 커피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적어도 평양에선 커피 수요층이 급격히 늘고 있다.
1990년대엔 외화상점에서만 캔커피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커피를 마셔봤던, 돈 많은 북송 귀국자들이 사 먹는 맛이 이상한 음료 정도로만 여겼다. 커피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비싼 커피를 살 돈이면 외제 담배 한 갑을 사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양에선 중산층 집에 가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대학입학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각성제로 마시는 것이 커피다. 좀 괜찮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야근을 서면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 내가 10여 년 전 남쪽에 와서 경험했던 ‘한 손에 커피, 한 손엔 담배’ 문화가 바야흐로 북한에서 막 시작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팔리는 커피는 당연히 중국산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진짜인지, 중국산 짝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산 ‘막대커피’도 시중에서 많이 팔린다. 커피에 대해선 북한 당국이 크게 통제하지 않는다. 하긴 통제해야 할 간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한국산 커피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커피 문화가 발달하면서 평양에도 커피숍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해 이젠 ‘24시간 커피숍’도 등장했다.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다. 커피 한 잔이 밥 한 끼 값과 맞먹는 남쪽과 체감 가격은 거의 비슷하다.
사실 남북의 70년간의 분단은 문화에서도 큰 장벽을 만들었다. 남쪽에 처음 와서 이곳에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러시아 명장 쿠투조프 원수를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나 역시 19세기에 활약했던 미국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이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러시아나 중국 영화만 보면서 자랐지만, 남쪽 사람들은 할리우드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언어만 통한다면 북한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보다는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과 더 문화적 동질성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남쪽 사람들도 북한 사람보다는 미국 사람과 훨씬 더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커피라는 대화 매개체라도 생긴다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평양의 커피 문화가 앞으로 확대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커피가 일상화되자 이젠 북한 부유층들 속에서 차별화를 위해 차 문화가 발달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손님에게 차를 꺼내 놓고 이 차가 얼마나 괜찮은 차인지 유래 정도는 읊어줘야 교양 있는 부유층이라 인정받는 분위기라 한다. 중국과 흡사한 모습이다. 이 역시 생필품의 9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여전히 중국 문화권에 머무르고 있는 북한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최근 북한 장마당엔 수십 가지의 차가 팔리고 있고 평양 시내에 찻집도 생겨나고 있다. 중국의 유명 차는 물론이고 강령녹차 같은 북한산 차도 인기가 있다.
장차 북한 음료계의 판세는 커피로 기울 것인가, 차로 기울 것인가. 남쪽을 빠르게 휘어잡은 커피의 중독성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