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YS 대항마, 박태준은 안돼” 盧는 서류봉투를 탁탁 쳤다

입력 | 2015-02-28 03:00:00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7〉3당합당과 경선시작




1992년 4월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반(反) YS 민정계 중진’ 6인 협의회 모임 도중, 사진기자들이 박태준 최고위원(왼쪽)과 이종찬 의원의 모습을 따로 잡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비공식적으로 ‘더이상 군 출신은 안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동아일보 DB

1992년의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은 나의 정치인생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경선 과정은 나의 한계를 확인한 계기이기도 했다. 정치인은 결과로 이야기하는 존재다.

그해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은 엄혹한 심판을 받았다. 선거 결과는 민자 149석, 민주 97석, 국민 31석, 무소속 21석으로 절대다수(218석)의 거대여당이었던 민자당이 단순 과반수도 얻지 못했다. 참패의 첫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민정, 민주, 공화의 부도덕한 3당 합당이었다.

총선이 실패로 끝나자 민자당 내에서는 자연히 책임론이 부상했다. 김종필(JP), 박태준 최고위원은 일찌감치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당사에 나오지도 않았다. JP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 의원! 어려운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래도 당선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자기 책임 하에 선거를 치른다는 사람이 선거 때 중진들을 ‘반줄’에 불러 지지서명이나 받고 있었다니 선거가 제대로 됐겠어요?” 나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김영삼(YS) 대표 측의 최형우 의원이 당 중진들을 서울 종로의 룸살롱 ‘반줄’로 불러 YS지지 설득작업을 펼쳤다는 것이다.

3월 27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 대표의 양자회동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역공을 했다. “총선 이후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면 대통령후보를 조기에 가시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5월에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자.”

그동안 ‘추대’를 요구해 온 김 대표는 ‘경선’으로 돌아선 대신 ‘5월 전당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총선 실패에 대한 책임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일거에 국면이 바뀌었다. 김 대표로서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를 10개월이나 남겨두고 차기 대통령후보가 가시화되면 권력의 누수현상이 일어날 것이 뻔한데 어떻게 이런 주문을 고분고분 받아들였느냐는 점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조기 전당대회 수용의 이면에는 노 대통령과 김 대표 간에 ‘사후(事後) 보장’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노 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 전 상공장관과 김 대표 측의 김창근 전 의원은 경상북도 영주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이 라인을 통해 밀약을 했다는 것이다. “아니, 3당 합당 때의 내각제 합의도 쉽게 깨버린 YS인데 그런 약속을 믿다니….” 민정계 내에선 비아냥거림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선 후보 경선 국면이 시작된 것이었다. 3월 28일 김 대표가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 직후 나는 박태준 최고위원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민정계에서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요. 청와대에서 왜 그런 합의를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노 대통령이 나나 김종필 최고위원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결정한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청와대 면담을 신청했다. 면담만 기대했는데 노 대통령으로부터 3월 30일 오찬까지 함께 하자는 통보가 왔다.

“각하! 전당대회를 조기에 갖기로 한 것에 대해 많은 말이 있지만 이미 결정하셨으니 이제 저희가 할 일은 어떻게 대회를 원만히 치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각하께서 경선하라고 강조하셨으니 이 문제도 저희 과제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민정계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각하의 방침을 듣기를 기대하지만, 그렇게 되면 김 대표 측에서 뒷말이 있을 것이니 그간 저희들이 논의한 내용들만 잠시 보고 드릴까 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노 대통령은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저는 원래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지만 지금의 형세는 민정계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주자로 박태준 최고위원을 밀자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하도 조심스러워 나의 의견이 아니라 제3자들의 주장인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이 의원! 박태준 최고위원은 안 됩니다.”

노 대통령은 박태준 최고위원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야기했다. 재산 문제 같은 것보다 훨씬 치명적인, 지금도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얘기였다. 노 대통령은 그런 정보가 자기 앞에 놓인 문서봉투에 들어있는 것처럼 그 봉투를 탁탁 쳤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 뿌리 깊은 오해가 있음을 직감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 이상의 정보나 자료를 나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대로 YS에게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오랫동안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습니다. 박 최고위원의 출마를 반대하신다면 저라도 나가야겠습니다. 이대로 김영삼 대표에게 독상을 차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노 대통령이 나의 출마도 반대하리라고 예상했는데 그는 의외로 나를 응시하면서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네”라고 쉽게 답을 했다.  
▼ 盧 “이종찬이 만나자마자 경선출마 통보”… 李 “박태준 출마 막기에 내가 나서겠다 해” ▼

노태우와 이종찬 180도 다른 기억


1992년 이종찬 의원의 대선 후보 경선 도전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기억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김영삼 대표가 (후보 경선 출마) 선언을 한 다음 날 이종찬 의원이 긴급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주십시오 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YS가 제멋대로 치고 나오는데 난들 왜 못 하겠느냐’는 배짱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나무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어서 YS의 돌출행동을 왜 다스리지 못했습니까? 이 꼴이 무엇입니까?’라고 따지는 것 같았다.”(노태우 회고록)

한국의 권력문화로 볼 때 매우 충격적인 장면묘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선택적 기억력’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그 즈음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었다. 특히 민자당 대표인 YS가 당 총재이자 대통령인 자신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불쑥 경선 출마를 선언한 데 대해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라고 흥분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종찬 의원이 찾아와 경선 문제를 ‘들이미는’ 형국이 돼버렸으니, 노 대통령으로서는 거두절미하고 불쾌한 대목만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노태우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단지 선택적 기억력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온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박태준(TJ) 최고위원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검토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면서 “그 이유로 첫째 그가 유능하지만 군 출신이고, 둘째 민정계의 (후보군인) 이종찬·이한동을 끌어안지 못했고, 셋째 그가 나설 경우 이종찬 쪽에서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먼저 TJ 대안론을 얘기했고, 노 대통령이 워낙 완강하게 ‘박태준은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다면 자기라도 나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기억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하튼 청와대를 나온 이종찬은 곧바로 서울 북아현동 TJ 집으로 갔다. 그는 “(TJ에 대한) 노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는 못하고 돌려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최고위원님을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TJ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소?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내가 나가면 김영삼 대표보다 훨씬 국가를 위해 좋을 것이라고 전달해 왔는데….”

이종찬의 증언. “그래도 청와대에서 들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놓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의 태도는 대단히 애매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박 최고위원이 나서면 적극 밀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청와대에서 그의 출마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 것이 분명하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보니 적극 지원에 나설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만저만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