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日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서 만나
그 날의 함성 들리는 듯… 3·1절을 나흘 앞둔 25일 저녁 한일 대학생들이 일본 도쿄 재일한국YMCA 내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을 돌아보고 있다(위쪽 사진). 아래 사진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불타기 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재일한국YMCA 전신) 모습으로, 지금의 YMCA 건물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3·1절을 나흘 앞둔 25일 저녁 역사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1906년 세워진 재일한국YMCA(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는 조국을 잃고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고 하숙집을 알선하는 보금자리였다. 회관은 원래 현재 위치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이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불타면서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회관 10층에는 2008년 정부 지원으로 조그만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이 마련돼 있다.
○ 일제 한복판서 2·8독립선언… 3·1운동 촉발
회관은 도쿄에 30년 만의 큰 눈이 내렸던 1919년 2월 8일을 증언하는 듯 보였다.
오후 2시에 맞춰 사회자가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백관수(귀국 후 동아일보 사장 지냄)가 단상으로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어나갔다.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강당에 박수가 쏟아지자 일본 경찰들이 단상으로 몰려들었다. 난투극 끝에 학생대표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송계백이 2·8독립선언문을 숨겨 한국으로 오자 민족지도자들은 큰 자극을 받았다. 2·8독립선언문을 기초로 3·1독립선언문이 작성됐고 재일 유학생 상당수는 고국으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냈고 중국 내 영자신문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25일 저녁 도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이날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은 한일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3년 설립한 인재 양성 기관인 흥사단 소속 대학생 11명이 일본 학생들과 교류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도쿄대 주오대 등 일본 대학생들이 지난해 9월 서울에 역사 여행을 갔다가 한국 대학생들과 교류한 게 계기였다. 이날 참석한 일본 대학생은 15명이었다.
양국 대학생은 먼저 영상물을 함께 시청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일본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흘끔흘끔 한국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일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실장은 놀랍게도 일본인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48) 씨였다.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에 1986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도쿄외국어대 조선어과에 입학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학생들을 도운 일본인 변호사와 하숙집 아줌마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평소 친한 조선인 친구가 있었다. 여기서 뭔가 배울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하자 일본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료실 견학이 끝난 뒤 인근 식당에서 열린 한일 학생 교류회. 양국 대학생들은 흉금을 터놓고 영어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 일본 여학생은 “재일 조선인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처음 알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다고 생각한다. 일본 학생들이 역사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채정민 씨(서울시립대 국사학과 2학년)는 “지난해 처음 만났을 때는 한일 간의 만남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친구 간의 만남이라는 느낌”이라며 “앞으로는 뭘 함께 할 수 있을지 얘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인솔한 문성근 흥사단 정책기획국장은 “3·1절을 앞두고 양국 학생들이 직접 만나 교류하는 의미가 크다. 이를 통해 공통의 역사 인식 기반이 구축된다면 더욱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