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기밀문서에 담긴 첩보 세계의 민낯 미남계 불사하는 모사드, 핵무기 정보 캐려 북한 관료 포섭 시도한 MI6
영국 런던에 있는 해외정보국(MI6) 청사(아래)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휘장.
그의 행동은 이상했다. 차를 운전할 때는 속도를 시속 30~90km 사이에서 자주 변경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몇 분 동안 도로가에 정차하기도 했다. 쓰레기봉투를 버릴 때는 더욱 기묘했다. 봉투를 통째로 쓰레기 컨테이너에 던져버리는 게 아니라 아랫부분을 잘라 내용물이 모두 흩어지도록 한 뒤에야 빈 봉투를 컨테이너에 던져 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뒤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사무실을 떠날 때는 자신이 가려는 방향의 인근 블록을 모두 살펴본 뒤 앞으로 걸어갔다.
평범한 신분 뒤에 감춰진 그의 진짜 실체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활동했던 외국 정보기관 요원이다. 최근 ‘스파이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아공은 세계 각국 정보기관 요원들로 북적인다. 남아공 정보기관 국가안보국(SSA)은 그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했다.
2월 23일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영국 일간 ‘가디언’이 SSA가 작성한 기밀문서 수백 건을 입수해 수면 아래에 있던 정보기관의 은밀한 활동을 폭로했다. 이 문서는 2006년부터 지난해 12월 사이 작성됐다. 남아공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다른 국가들의 정보기관과도 정보를 공유하거나 업무 협조를 하고, 미국은 5개국 정보 협력체 ‘파이브 아이스(Five Eyes)’의 일원으로 수집한 정보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공유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SSA 기밀문서에는 전 세계 주요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가 고스란히 담기게 됐다. 각국 정보요원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며 정보를 얻어내는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여준다.
첩보기술은 각종 관련 장비의 개발로 50년 전에 비해 크게 향상됐지만, 정보요원의 생활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현장요원들의 업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위험 부담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정보요원 대부분은 평소 부드럽고, 때로는 관료적인 일상을 보낸다. 정부기관 관계자를 만나거나 다른 정보기관 요원과 접촉하는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 ‘007 시리즈’ 같은 첩보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공개된 SSA 기밀문서는 ‘모험적인 삶을 추구하거나 돈과 지위를 얻을 목적으로 정보기관 요원에 지원하는 사람은 채용에서 탈락시켜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과 다른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한 요원은 남아공 케이프타운 소재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 지역 책임자와 만나기로 했다. 그는 공중화장실에서 지역책임자 등 요원 2명을 스치듯 만났다. 이들 중 1명은 아랍국가 출신. 모사드 요원들은 남아공의 경찰과 정부 공무원, 경찰의 범죄정보기관 담당자 등 주로 3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얻었고, 이들의 정보는 수준이 매우 높았다. 남아공에서 얻을 수 있는 어지간한 고급 정보는 모두 취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사드 요원은 호텔에서 3주 동안 지냈다. 며칠은 가족까지 데려와서 함께 보냈다. 호텔 숙박비 등 관련 비용은 이스라엘항공과 한 타이어회사의 명의로 지불했다. 모사드 요원이 이스라엘항공 직원으로 위장해 활동하는 것은 전형적인 업무처리 방식. 모사드가 이 회사를 창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이 들통 날 때도 있고, 항공사 직원으로 위장한 요원이 추방되기도 한다.
2월 23일 공개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기관 국가안보국(SSA)의 기밀문서(왼쪽)와 이를 보도한 영국 일간 ‘가디언’의 관련 기사.
모사드는 정보를 얻기 위해 미인계도 불사했다. 여성요원에게 섹스를 무기로 정보를 얻어내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기대할 때는 있다. 성관계를 빌미로 협박하거나 함정수사를 펴는 작업이 임무에 포함된다면 실제 성매매여성을 고용하기도 한다. 모사드 수뇌부는 외국 대사의 여비서와 항공기 여승무원 등 고급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친밀도를 높이고자 남성요원을 활용하는 일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공항 환승출구의 비밀작전
MI6는 국제사회의 위협으로 등장한 북핵 정보를 캐내고자 북한 인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MI6가 ‘X’로 명명한 이 북한 남성은 핵 프로그램에 관한 최고 수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다. MI6는 X를 포섭해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핵무기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불투명한 북한의 정책결정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덤이다. ‘알자지라’ 등은 X의 신원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문서에 등장하는 X 관련 정보를 모두 가린 채 공개했다. 북한 당국이 추적할 수 없도록 문서가 작성된 날짜도 지웠다.
MI6는 기밀문서 작성 1년 전 X와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은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정보를 건네는 대가로 거액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은밀한 관계’ 유지를 희망한다는 뜻도 전달했다. X는 이 제안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MI6 요원에게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겠다”며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당시 MI6는 X가 결심을 굳히면 회신할 수 있게 보안이 유지되는 비밀 전화번호도 건넸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급해진 MI6는 X와 다시 만나고자 해외 비밀작전을 계획했다. X가 남아공 공항에서 환승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뒤 SSA에 합동작전을 요청한 것. MI6는 SSA가 X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그의 여행 일정과 탑승 비행기 편명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 MI6는 SSA에 “북한의 비밀 핵 프로그램을 파악하기 위해 핵심 인사를 포섭하는 흔하지 않은 기회”라며 “협조한 사실은 비밀에 부쳐질 것”이라고 약조했다.
아쉽게도 SSA 기밀문서의 설명은 이 대목에서 끝이 난다. MI6가 실제로 X와의 재회에 성공했는지, X가 스파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불분명하고, 스파이 수락 여부 등 좀 더 구체적인 내용도 문서에 기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첩보원들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각 나라가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엿보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영화보다 밋밋하지만 그만큼 한층 더 차가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진짜 실체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년 3월 4일자 97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