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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4주년… 시골마을 이타테 촌의 비극

입력 | 2015-03-04 03:00:00

주민 떠난 논밭엔 오염된 흙 담긴 비닐백만…




지난달 26일 후쿠시마 시내의 한 보육원에서 4년 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설명하고 있는 간노 유미 씨. 그는 원전에서 일하던 남편에게서 긴급 전화를 받고 사고 바로 다음 날 피난을 떠났다. 후쿠시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여보, 빨리 짐을 싸서 후쿠시마(福島) 밖으로 떠나.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일본을 떠나.”

후쿠시마 현 소마(相馬) 군 이타테(飯관) 촌에 살던 주부 간노 유미(菅野友美·29) 씨가 남편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때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당일인 2011년 3월 11일이다. 남편은 사고가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간노 씨는 당시 한 살이던 아들 레온(麗央)을 데리고 친정 부모가 있는 후쿠시마 현 니혼마쓰(二本松) 시로 급히 피난했다. 이타테 촌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이다. 그나마 그녀는 운이 좋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이웃들은 고스란히 방사성 물질에 피폭당했다.

이타테 촌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30∼50km 떨어져 있다. 일본 정부는 30km 이내 지역에 대해서만 피난 혹은 옥내 대피 지시를 내렸으나 방사성 물질은 바람을 타고 이타테 촌을 지나갔다. 약 한 달이 지나서야 일본 정부는 이타테 촌을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지정했다.

11일로 동일본 대지진 및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지 4주년이 된다. 사망 및 실종자는 1만8483명. 지금도 피난민이 22만9000여 명에 이른다. 일본 전역에서 이뤄지는 재기를 위한 노력이 눈물겹지만 아직도 상처는 깊다. 이타테 촌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5일 후쿠시마 역에서 동쪽으로 약 50분 동안 차를 타고 달리니 완만한 구릉지가 나왔다. 집은 드문드문 보였고 산과 논밭만 펼쳐져 있었다. 이타테 촌이었다. 농업과 축산업 종사자가 많은 이곳은 지진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3대가 함께 살면서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곳이었다. 2010년 기준 촌민들의 1인당 연간 소득은 168만 엔(약 1550만 원). 후쿠시마 현 평균(259만 엔)보다 훨씬 적지만 촌민들의 삶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쌀과 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자급자족이 많아 돈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깨끗해 마을 한중간에 마라톤 코스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검정 비닐백’ 천지 후쿠시마 현 이타테 촌에서 인부들이 굴착기로 오염토가 담긴 검정 비닐백을 옮기고 있다. 비닐백은 이타테 촌의 논밭에 놓여 있는데, 전체 농지 800ha(1ha는 1만 m²) 중 약 3분의 1을 덮고 있다. 후쿠시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이날 기자의 방문을 가장 처음 반긴 것은 논밭에 쌓인 검은색 대형 비닐백이었다. 백 안에는 오염토가 담겨 있다. 저장할 장소를 찾지 못해 논밭에 쌓여 있는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자 절반 정도 깎인 산이 흉측하게 서 있었다. 오염토를 파낸 자리를 산을 깎아 낸 흙으로 덮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타테 촌은 ‘주거 제한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낮에만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도 매일 7000명의 인부들이 오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주민센터 앞에 설치된 방사선량 측정기는 시간당 0.40μSv(마이크로시버트)를 나타내고 있었다. 같은 날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구는 0.04μSv였으니 10배나 높고 일반인의 인공 방사선 피폭 한계(연간 1000μSv)를 시간당으로 계산한 0.19μSv보다도 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산등성이 낙엽 더미에 측정기를 댔더니 6.49μSv까지 치솟았다. 시민단체인 ‘후쿠시마 재생 모임’의 다오 요이치(田尾陽一) 이사장은 “바람이 불면 산에 내려앉은 방사성 물질이 흘러내려와 갑자기 수치가 높아지곤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고 전 이곳 주민은 약 6000명이었다. 90% 주민들이 승용차로 1시간 이내 거리인 후쿠시마 현 내에 피난해 있고 나머지는 현 이외 지역으로 떠났다. 미무라 사토루(三村悟) 후쿠시마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고 후 예전 가족 구성원이 다 함께 사는 가정은 44.7%에 그쳤다.

앞에서 언급한 간노 씨 가족도 사고 전 6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3곳으로 흩어졌다. 자신과 남편, 아들은 후쿠시마 시 임대주택에서, 시어머니는 혼자 가설 주택에서,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 부부는 또 다른 가설 주택에서 살고 있다. 간노 씨는 “과거가 그립다. 이제 그런 시절이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현의 경우 동일본 대지진으로 1608명이 죽었다. 그 후 대지진의 간접 피해로 인한 희생자도 있어 총 1793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무라 교수는 “열악한 피난 환경, 심리적 상실감, 인간관계 붕괴 등 대지진의 2차 피해로 죽은 사람이 후쿠시마에 유독 많다”고 설명했다.

평화롭던 이타테 마을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대지진의 악몽은 4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후쿠시마=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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