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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이 말한다 “그림은 힘들어”

입력 | 2015-03-04 03:00:00

하이트컬렉션 ‘두렵지만 황홀한’전




전현선 씨(26)의 수채화 ‘연못 대화들’(2015년). 판단을 유예한 외적 대상을 뭉뚱그려 ‘원뿔’로 형상화한 뒤 스토리를 가진 동화적 상황 속에 소통을 상징하는 도구로 삽입했다.

 

왕선정 씨의 아크릴화 ‘보들레르의 유령들’(2013년) 연작 중 일부. 바 너머 취객의 갖가지 모습에 대한 경험을 음울한 빛깔로 녹여냈다.

《 “회화는, 힘들어.” 언젠가 한 작가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취재를 거듭하며 여러 번 곱씹었다.
6월 5일까지 서울 강남구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리는 ‘두렵지만 황홀한’전은 회화 작업에 주력하는 20∼40대 젊은 작가 13인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이다.
중간쯤 보다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다시 생각했다. ‘회화, 힘들겠다.’ 》



경험에서 끌어낸 무언가를 이미지로 구상하는 시간을 제외한 물리적 작업시간만 따져도 그림 앞에서 관람객이 머무는 찰나와 비교할 수 없다.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어떤 주체로부터든지 경제적 지원을 끌어내야 하는 작가로서는 그 찰나를 최대한 늘리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튀어야’ 하고, 회화로는 확실히 튀기가 그리 쉽지 않다.

김민호 씨의 ‘난지’(2015년). 사진으로 촬영한 이미지 위에 목탄으로 그렸다 지우는 행위를 여러 겹 쌓아 올려 환영 같은 풍경을 얻었다. 하이트컬렉션 제공

참여 작가들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됐거나 세대를 대표하는 스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달리기에 지쳐가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이들이다. 회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이렇게 한번 튀어 볼까’ 하는 갈등 사이를 오간 작품 110점이 불균일하게 걸렸다. 그 불균일함 덕에 흥미롭다.

문 열고 나올 때의 뒷맛을 위해 지하 1층부터 보고 2층으로 올라가길 권한다. 무거운 물체가 더 아래쪽에 가라앉듯 지하 전시 작품이 더 우울한 편이다. 어둠의 절정은 왕선정 씨(25)가 내놓은 ‘보들레르의 유령들’. 2년 전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메모지에 끼적인 캐리커처를 하나하나 아크릴화로 발전시켰다. 메모지 원화를 유리 상자에 넣어 작품 앞에 함께 전시했다. 죄다 대출업체 홍보용 메모지다. ‘무이자 빠른 대출’ ‘즉시 대출’…. 캔버스 속 바에 앉은 각양각색 인물들이 술잔을 앞에 놓은 채 욕지기를 씹어내고, 피눈물을 쏟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출입구 옆에는 김민호 씨(40)의 4m 너비 목탄화 두 점이 있다. 캔버스 위에 아교를 바른 뒤 목탄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이미지가 옛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한 폭은 북한산, 다른 하나는 난지도다. 잡았다 흐리기를 거듭해 형성한 모호하고 흐릿한 윤곽이 역설적으로 또렷한 사실성을 드러낸다.

전시 표제는 2층에 놓인 유한숙 씨(33)의 작품명에서 가져왔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납작붓으로 그린 포스터컬러 그림처럼 만화를 닮은 이미지에 고딕체 스텐실 표어를 붙였다. 다가가서 뜯어읽으면 웃음을 참기 어렵다. ‘일이 있으면 좋겠는데 일하기 싫다.’ ‘고민하지 마 안할 거잖아.’ 천장에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정장 차림 남자의 속내를 매달았다. ‘내가 가정이 있어서 그래,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내가 앉고 싶어서 그래.’ 현실에서 막 퍼내 가져온 장난질이다.

정은영 씨(26)는 유화물감으로 케이크를 만든 뒤 캔버스 위에 내동댕이쳤다. 끈적이며 흘러내릴 듯 두툼하게 쌓인 물감 더미 앞에 정교하게 만든 케이크도 함께 놓았다. 물감으로 만든 김밥 한 줄도 그 곁에 나란히. 웃기면서 어째 서글프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