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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독일서 흘린 땀과 눈물이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 돼”

입력 | 2015-03-05 03:00:00

부산시, 파독 광부·간호사 19명 초청… 대통령 감사편지 전달 및 지원 약속




4일 부산 연제구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재부 파독 광부·간호사 감사 서한 전달식’에서 서병수 부산시장(오른쪽)은 박근혜 대통령의 감사 서한을 이날 참석한 파독 광부·간호사 19명에게 일일이 악수하며 전달했다. 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1. 1966년 꽃다운 나이인 22세 때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건너갔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이 길을 택했다.

“돈도 벌고, 간호사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김정순 독일명예영사(71·여)는 “흘러간 옛일은 개인 사정일 뿐”이라면서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대한민국이 고맙다”고 말했다. 김 영사는 당시 본대학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했다. 일과 시간이 끝나면 이를 악물고 독일어를 배웠다. 1968년에는 본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해 주경야독으로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71년 5월 귀국한 그해 9월 메리놀간호대(현 부산가톨릭대)에 편입해 1973년 간호사가 됐다.

그러나 독일 정부와 기업의 ‘러브콜’이 쏟아져 국내에서는 간호사 대신 독일어 통역원과 직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조선 기자재 업체인 ㈜한국담수토부 대표와 독일명예영사를 맡고 있다. 김 영사는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이야기 그대로다”면서도 “영화에서는 당시 독일인을 잘못 그렸거나 오해한 부분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2. 1964년 25세이던 정진호 씨(76)는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말단 경찰공무원이던 그는 적은 월급으론 미래가 암울했다고 판단했다. 선진국인 독일로 가려면 광부로서 파견되는 방법이 유일했다.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지금은 한국이 천지개벽이 됐지만 당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죽음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땅 밑 1000m까지 내려가 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으니까요.” 낯선 독일 탄광 막장에서 하루 6시간씩 일하며 3년 계약 기간을 끝내고 1967년 귀국한 정 씨는 선진 한국의 기틀을 다진 주인공의 한 명이었다. 정 씨는 당시 번 돈을 밑천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1970년 세무공무원이 됐다. 이후 1998년 정년 때까지 부산세관 등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현재 관세사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정 씨는 “영화 국제시장처럼 막장에 갇혀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며 “그 당시 후유증으로 허리디스크와 폐 질환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파독 53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일에 파견됐던 부산지역 광부·간호사 19명을 4일 낮 12시 시청 근처 음식점으로 초청해 대통령의 감사 편지를 전달하고 점심을 함께했다. 편지에는 ‘대한민국은 여러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시는 이들에게 8·15 광복절에 ‘한독 시민기념음악회’를 열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파독 광부·간호사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여러분의 땀과 눈물이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며 “늦었지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참석한 파독 광부·간호사들은 “우리의 노력과 봉사가 조국 발전에 보탬이 됐다니 보람으로 느낀다”고 화답했다.

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