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겸직 각료 ‘폴리스터’의 세계
지난달 17일 개각에서 새누리당의 유일호, 유기준 의원이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 장관에 각각 내정되자 당의 한 중진 의원이 걱정하며 내뱉은 말이다. 한때 장관을 겸직했던 그는 한마디로 “연말이면 끝이다. 100% 잘못 됐다”고 우려했다.
내년 4월 13일 치러지는 20대 총선 출마에 뜻이 있는 국회의원 출신 장관들은 12월 정도가 되면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떼고 선거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6일 동아일보는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내각에 참여한 역대 겸직 국회의원들의 현황을 전수조사했다. 조사 결과 국무총리(7명) 및 장관(52명)을 겸직한 의원은 모두 59명이었다. 현재 박근혜 정부에서 겸직 중인 이완구 총리와 최경환 황우여 부총리,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 등 4명을 제외한 55명의 평균 재임 기간은 11개월이었다.
김영삼 정부 5년 동안에는 총리 1명과 장관 18명이 평균 10개월간 내각에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총리 3명과 장관 12명을 배출했고, 평균 재임 기간은 11개월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총리 2명과 장관 7명이 입각했고 평균 재임 기간은 14개월로 조금 늘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현역 의원이 총리가 된 적은 없었고 9명의 장관이 평균 12개월 동안 재임했다.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에서 유일호, 유기준 의원이 청문회를 통과하면 총리와 장관 17명 가운데 3분의 1인 6명이 현역의원 출신이다. 정치인과 각료의 합성어인 ‘폴리스터(polister·politician+minister)’ 전성시대라는 말도 나온다. 총리와 부총리 두 자리 등 내각의 핵심 포스트를 현역 의원들이 차지해 실질적인 영향력도 막강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만 해도 현역 의원 출신 장관은 유정복 안전행정부,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 등 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인 내각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실상 ‘의원내각제’가 된 것 아니냐는 농담도 있다.
국회법 29조는 ‘의원은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직 이외의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정치인 총리와 장관은 현행법상 문제가 없다.
폴리스터들은 내각 소속이 되어도 현역 의원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주요 법안 투표권 등 의원 고유의 권한을 보유한다. 의원회관 집무실도 그대로 유지되고 보좌진 급여와 사무실 운영 경비 등도 계속 지급받는다.
청와대, ‘현직 프리미엄’ 최대 활용
역대 대통령들이 현역 의원 출신 장관을 선호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의 용이성이다. 역대 청문회에서 현역 의원 출신 후보자가 탈락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청문위원들인 국회의원들이 ‘동업자 의식’을 발휘해 검증의 칼날을 날카롭게 들이대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실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의원들은 리스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인사청문회를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다. 아울러 의원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여야 의원들을 설득시켜 국회 협조를 받아내는 데 좋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도 “해당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한 의원이 장관이 될 경우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며 “교수 출신보다 부처를 장악하는 데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정세균 의원도 “정치인이 부처 장악을 잘할 수 있고, 국회와의 소통 및 외풍 저항력도 강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김진표 전 의원은 “의원들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했다.
포퓰리즘 우려 및 삼권 분립 위반 논란
그렇다고 내각 겸직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지역구를 가진 현역 정치인으로서 유권자들의 표심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대중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흐르기 쉽다는 우려가 있다. 특히 선거가 다가오면 중도 사퇴가 불가피해 잘했든 못했든 다시 개각을 해야 한다. 결국 정책 추진의 연속성을 떨어뜨려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원길 전 의원은 “장관 겸직은 ‘양날의 칼’과 같다”고 규정했다. 그는 “국회로 원대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장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을 밀어붙일 수 있다”면서도 “정치인으로서 여론에 너무 민감해지고 소속 정당의 의견도 생각하기 때문에 본가(소속 정당)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장관직을 맡았던 여당 중진 의원도 “자기의 정치력을 넓히기 위해 장관직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삼권 분립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국회는 기본적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인데 장관을 겸직하는 경우 모순에 빠지게 된다”며 “비록 헌법에 국무총리제도라는 내각제적 요소가 있지만 대통령제 입장에서는 장관이 되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몸은 세종시-마음은 지역구’
현실적으로 국정운영에만 매진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현재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한 의원은 지난달 설 연휴 기간 자신의 지역구를 둘러봤다고 한다. 최근 연말정산 파동과 담뱃값 인상 등으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인기가 올라가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당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다. 당이 요새 흔들리는 것 같다”며 내년 총선을 걱정했다. 주요 국정현안에 자신의 직(職)을 걸고 다걸기(올인)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지역구 민심을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은 “아무래도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행정에만 집중하기 어렵다”며 “공무원들로서는 장관이 다음 총선에 나가기 위해 사퇴하기까지 10개월만 버티자는 심리가 작동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관직 선호하는 금배지
현역 의원들은 장관직을 선호한다. 의원은 자신이 법안을 발의해도 여야 의원의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되지만 장관은 결단만 내리면 자신의 정책을 곧바로 실현시킬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때 장관을 지낸 전직 의원은 “부처 실·국장 인사를 포함해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했다”며 “직원 500여 명이 내 뒤에서 서포트(지원)를 하기 때문에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새누리당 의원도 “한마디로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원들은 행정부가 집행력이 있기 때문에 국정에 참여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역구 주민의 장관직 선호도 주요 배경으로 거론된다. 지역 출신 의원들은 임기 4년이 지나면 매번 선출되지만 장관은 그 지역에서 자주 배출되지 않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장관을 겸직했던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주민은 과거 행정부 우위 시대의 관습이 있기 때문에 장관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지역 주민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장관을 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원들도 장관직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장관을 지낸 행정 경험이 향후 대선 출마의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선호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욕이 강하다”며 “장관을 지낸 경험은 행정력이 검증됐다는 측면에서 자신의 경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다만 현역 의원으로 내각에 참여했던 인사 중 주요 정당의 최종 대통령 후보가 됐던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고성호 sungho@donga.com·배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