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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마음을 나눈다는 것

입력 | 2015-03-10 03:00:00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이 항상 추웠던 것처럼 작년 겨울도 매우 추웠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날카로운 바람에 행여 외투 자락이 펄럭일까 무서워 두 손은 단추를 여미느라 분주했다.

복잡했던 한 해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시내에서 약속이 있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연말답게 시끌벅적했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 제자리에 서서 종을 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붉은 자선냄비를 알리는 봉사자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지갑 속 지폐 한 장을 꺼내 냄비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구멍 속에 지폐를 넣으며 봉사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여름에 걸려왔던 전화 한 통이 떠올랐다.

전화가 왔던 그날은 매우 더웠다.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서점을 택했던 나는 평소 읽고 싶은 책을 적어 놓은 수첩을 꺼냈다. 그중 가장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살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장을 지나고 수필 책장을 지나 소설 책장에서 찾은 두 권의 책을 비교하려던 찰나에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틀에 두세 번꼴로 걸려오는 광고성 스팸 전화겠거니 싶었다. 그래도 모든 전화를 다 받아야 하는 성격 탓에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이라니. 내가 누군가를 가르쳤던 적이 있었나 싶어 의아했지만 일단 듣기로 했다. 전화기 건너편의 여자는 목소리가 맑은 사회복지사였다.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바로 끊었던 많은 광고 전화와 달리 그 전화는 쉽게 끊을 수 없었다.

복지사의 이야기는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문제집 한 권 사는 것조차 힘든 소년·소녀 가장의 이야기.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후원의 생각이 스쳤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인 것에 대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빨리 옹졸한 현실로 돌아왔다. 사회복지사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정이 나아지면 꼭 돕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는 책을 사지 못했다. 사고 싶은 책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머릿속에 맴돌던 이야기들이 수첩을 펼칠 때의 가벼운 마음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그 전화가 다시 생각났다. 바쁜 일상 때문에 잊어버렸다는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던 날 해당 복지시설에 관해 확인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복지사의 이야기를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주변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꼭 금전적 도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생활이 벅차다는 이유로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갖고 있기에 벅찬 마음의 짐을 나눠 들고 좋은 마음을 얹어줄 방법은 없을까. 고민이 시작됐다.

새해가 밝으면 1월과 2월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적는 시간을 가진다. 두 달 동안 작성하는 그 목록은 스스로 지켜줬으면 하는 당부의 마음으로 채워진다. 올해의 목록 중 가장 마지막 항목을 채운 것은 ‘마음을 나눌 것’이다. 어떤 기발한 방법이 떠오른 것은 아니다. 당장 오늘부터 어느 단체에 후원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돕기 전에 나의 마음부터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마음을 나눈 적은 언제였는지 떠올려봐야 한다. 앞으로 진심을 담은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스쳐 가는 마음일지라도 진심을 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기나긴 추위가 끝나면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봄이 온다. 작년보다 따뜻한 올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앞세우기 전에 퍽퍽하게 굳어있는 마음부터 풀어야겠다.

나부터 따뜻해져야 이 마음을 온전히 나눌 수 있다. 이런 고민을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