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방일 현장에서 보니
이윽고 오전 11시 20분 검은색 벤츠 승용차가 신문사 정문 앞에 섰다. 밝은 하늘색 재킷을 입은 메르켈 총리가 차에서 내려 환하게 미소를 짓자 기자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와” 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긴자(銀座)중학교 2학년생 40명은 미리 준비한 독일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었다. 메르켈 총리가 다가가 일일이 악수를 하는 모습이나 한 중학생이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영어로 인사말을 건네자 독일어 대신 영어로 “생큐”라고 답하는 모습이 감동을 안겼다. 인파 속에 있던 40대 시민은 “정치인이기도 하고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이라고 들어 권위적이고 빈틈없는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말했다.
당초 메르켈 총리의 방일은 6월 독일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준비 성격이 강한 의례적 행사여서 메르켈 총리가 아베 신조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과거사 문제를 발언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이런 관측은 빗나갔다.
신문사 강연, 기자회견에 야당 대표까지 만나면서 과거사 직시는 물론이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거론할 정도로 할 말을 다한 것이다. 심지어 일본인들에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상처로 남아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언급하면서 독일의 원전 폐기 정책을 소개했다. 10일 산업계 여성 지도자들과의 조찬에서는 “일본 과학계에서 활동하는 여성이 적은 것은 문제”라며 여성의 능력 발휘에 호의적이지 못한 일본 사회 분위기까지 짚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40대 중반에 독일 기독교민주당(CDU)의 당수가 되었을 때 ‘여자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남자인데 총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남자아이들이 있을 정도”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다.
베를린에서부터 그를 수행한 외국 언론사 기자에게 메르켈 총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마음을 정하기가 어렵지 한번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또 서민적이다. 남편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쇼핑하거나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독일 언론들은 “일본 정부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아주 노련하게 처신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무관심했다. 메르켈 총리의 발언을 상세히 보도한 곳은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 등 일부에 불과했으며 요미우리신문과 NHK 등 대부분 언론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작게 취급했다. 심지어 산케이신문은 11일 외무성의 한 간부의 말을 소개하면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오랜 친분이 있어 (일본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유럽 각국은 한국의 로비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도해 메르켈 총리의 행동이 한국의 로비 때문이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1일 지한파로 알려진 집권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총무회장의 발언이 주목된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도 할 말은 많지만 해결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도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시대에 빨리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 일본 정치권에서도 뭔가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메르켈 총리의 방일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일본은 과연 그가 던진 메시지에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박형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