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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기자의 히트&런]빠른 경기? 재미있는 야구가 먼저!

입력 | 2015-03-12 03:00:00


일본 야구만화 ‘H2’의 한 장면.

“삼복더위에 질질 끄는 경기는 관전의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1995년 8월 1일자 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 프로야구의 경기 시간이 점점 늘어나 팬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에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이듬해부터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흥미롭게도 ‘스피드 업’에 관한 논의는 20년 전에도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더 흥미롭게도 그해 한국 프로야구의 경기당 평균 소요 시간은 2시간 57분밖에 되지 않았다. 역대 최장이었던 지난해의 3시간 27분보다 30분이나 짧았다.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2시간 반 안팎이 이상적인 경기 시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한국 프로야구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투수들은 선발-중간계투-셋업맨-마무리로 철저히 분업화됐고, 타자들의 장비 및 스윙 기술은 놀랍도록 좋아졌다. 예전 같으면 손도 못 댈 공들이 요즘은 커트당하기 일쑤다. 수비의 발전은 또 어떤가. 대부분 팀이 선수에 따라, 볼카운트에 따라, 투수가 던지는 공에 따라 시프트를 활용한다. 이는 메이저리그도 똑같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의 평균 경기 시간은 3시간 8분으로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가 경기 시간을 관측한 1950년 이후 가장 길었다.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경기 시간이 늘어난 또 다른 이유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경기 후반 5점 정도 벌어지면 승부는 대개 그대로 끝났다. 승패와 큰 관계가 없으니 투수들은 과감하게 승부를 걸었고, 타자들은 시원하게 스윙을 했다.

그런데 요즘 야구는 8회에 10점을 이기고 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투수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타자도 대충 스윙을 하지 않는다. 한 개의 공, 한 번의 스윙에 수천만 원의 돈(연봉)이 왔다 갔다 하니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 경기 후반 5점 차에서 나오는 번트는 상대 팀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요즘은 한 점을 더 달아나는 게 당연한 작전이 돼버렸다.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건 거스르기 힘든 현대 야구의 추세인 셈이다.

올해 시범경기부터 한층 강화된 스피드 업 규정을 적용하고 있는 KBO도 이 같은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LG 이진영이 ‘소련 야구’라는 표현을 써 더욱 화제가 된 ‘타석을 벗어날 경우 자동 스트라이크를 주는 규정’은 야구의 근본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KBO가 스피드 업을 강조하는 것은 현장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안 그래도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데 선수들의 늑장 플레이까지 더해질 경우 팬들의 경기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KBO 관계자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스피드 업 규정을 적용했지만 강력한 페널티가 없다 보니 유야무야 되곤 했다. 이번엔 감독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빠른 경기 진행을 의식하는 것 같다. 인식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 규정이 정규시즌에도 적용될 확률은 ‘0’에 가깝다. ‘야구의 재미’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KBO리그가 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야구의 본질을 저버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방안은 스피드 업 규정을 위반하면 메이저리그처럼 벌금(건 당 500달러)을 매기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드 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콘텐츠, 곧 경기력이다. 재미있는 영화는 4시간을 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반면 내용이 시원찮은 영화는 1시간도 지켜보기 힘들다. 많은 야구팬이 야구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은 경기력에 대한 실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경기도 지겹게 흘러가는데 선수들까지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야구는 ‘여백의 스포츠’다. 경기 시간을 10분 줄이자고 경기의 재미를 포기할 팬들은 없다. 재미를 주는 건 선수들의 몫이다. 일본의 야구만화 ‘H2’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재미를 가르쳐 드리지요.” 올해는 정말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