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정치부 차장
지금은 흔하게 듣는 용어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북한의 급변사태나 전면전에 대비한 한미 연합 작전계획 5029, 5027 같은 용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우리 정부가 마련해 둔 북한 붕괴 대비 시나리오인 충무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10월 4일 국정감사장에서는 충무계획의 일부가 전격 공개되면서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충무 9000’ 계획에 따르면 (북한) 긴급 상황 시 장관이 총독 이상의 막강한 권한을 갖는데…”라고 질의한 것. 정 장관은 이 질의에 답한 뒤 부랴부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며 속기록 삭제를 요구했다. 속기록에 남아 있지 않게 됐지만 보도까지 없었던 일이 되지는 못했다.
10일 통일준비위원회 정종욱 부위원장이 ROTC중앙회 조찬포럼에서 “평화적인 합의통일과 동시에 ‘비(非)합의통일’, 그러니까 체제통일만 연구하는 팀이 위원회에 따로 있다”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북한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통일준비위원회라는 ‘괴뢰기구’를 만들어 흡수통일을 연구하는 것은 반(反)민족적 적대 행위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성토가 나올 것이다. 2004년에도 7월 조문파동(김일성 10주기 조문 불허)이 불거지고 탈북자 460명이 한꺼번에 입국한 상황에서 충무계획까지 공개되자 북한 당국은 ‘남북대화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집권 3년 차에 어떻게든 남북관계 복원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박근혜 정부로서는 대형 악재다. ‘통일의 초석’을 놓겠다고 공언해 온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으로 있는 통준위가 대형 설화(舌禍)를 자초한 셈이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주위 사람들이 정말로 도움이 안 된다’며 장탄식을 할 법도 하다.
돌이켜 보면 북한은 어차피 통준위가 출범할 때(지난해 7월 15일)부터 “흡수통일을 위한 기구”라고 규정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체제통일을 다그치자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북한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통준위의 존재 이유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정 부위원장이 안쓰러워 보인다. 북한 ‘김씨 일가’가 남한 통일부 장관을 정한다고 호언하던 시대도 한참 지나지 않았나.
지난해 12월 29일 통준위 부위원장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정 부위원장이 상기된 얼굴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 1월에 상호 관심사에 대해 대화하자”고 제안했지만 북한은 일언반구가 없다. 박근혜 정부와 함께 순장(殉葬)될 조직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자 철저한 무시 전략이다.
정 부위원장이 강조한 대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북한을 흡수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예고 없이 태산처럼 다가올 수도 있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완벽한 흡수통일 계획은 마련돼 있어야 한다. 그게 통준위에 부여된 역사적 소임이기도 하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