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8일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 현장.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와 고배, 벼루, 뚜껑, 기와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礎石·초석)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C구역의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번 시굴을 계기로 C구역의 서쪽에 있는 A구역 쪽에 정전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월성 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물터 6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지.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는 제작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