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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투혼’ 두 글자 써줬더니… 태극전사들이 펄펄

입력 | 2015-03-21 03:00:00

‘기부왕 서예가’ 열암 송정희 선생의 축구 사랑




서예가 열암 송정희 선생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한국축구의 영원한 후원자가 됐다. 그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쓴 ‘투혼’ 두 글자는 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져 태극전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송 선생이 17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개인 사무소에서 다시 투혼을 써 보이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을 때다. 당시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찾아와 ‘투혼(鬪魂)’이란 두 글자를 써달라고 했다. 한국 선수들이 강력한 정신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 유니폼에 새기겠다고 했다. 흔쾌히 써줬다. 당시 한 자당 기백만 원을 받는 유명 서예가였지만 한국 축구를 위해 기부했다. 이때 쓴 투혼은 독일 월드컵 당시 박지성의 슈팅 모습과 함께 동아미디어센터 건물에 걸개그림으로 걸려 축구팬들의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열암(洌菴) 송정희 (사)한민족문화협회 이사장(70)은 한국 축구의 영원한 후원자다. 그때 써준 투혼은 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져 그야말로 ‘투혼’을 불어넣고 있다. 1월 끝난 호주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태극전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아쉽게 준우승했지만 국민들은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투혼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용기를 의미한다. 한국 축구의 강인함과 고유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다. 독일 월드컵 때 유니폼 상의 오른쪽 뒷면 하단에 새겨졌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협회 문양이 새겨진 부분의 바로 왼쪽 선수들의 심장이 닿는 안감에 자리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유니폼에는 상의 목덜미 안쪽에 새겼다.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한 ‘사즉생(死則生) 생즉사(生則死)’은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전쟁에서 너도나도 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죽을 각오를 해야 이길 수 있다. 축구가 뭔가. 총성 없는 전쟁 아닌가. 총을 들지 않았을 뿐 국가 대 국가, 팀 대 팀이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정신력이다. 대한민국은 투혼의 역사다.”

송 이사장은 태극마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를 대표해 뛴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면 죽을 각오로 뛰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 태극전사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혼이 한국 4강 신화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보여준 선수들의 열정이 4000만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11명의 선수와 공 하나가 4000만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남녀노소가 다 축구를 좋아한다. 참 묘하지 않나. 어떤 스포츠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11명이 녹색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또 다른 11명을 무너뜨리는 축구. 한번 빠지면 그 마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축구의 매력은 대단하다.”

2006년 송정희 선생이 써준 ‘투혼’이라는 글자는 독일 월드컵 당시 박지성의 슈팅 모습과 함께 동아미디어센터에 걸개그림으로 걸려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왼쪽 사진 점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오른쪽 사진 점선). 동아일보DB

송 이사장은 40여 년 전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면서 축구와 인연을 쌓게 됐다. 현대건설과 그 계열사 현판을 써 준 게 계기였다. 정 전 회장이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1999년 완공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 사무실을 내줬다. 축구와의 직접적인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놀면서 축구했지만 사실 축구의 축자도 몰랐다. 정 회장께서 축구회관 4층 일부를 내줘 거기서 작업을 했다. 정 회장과의 인연으로 2002년 월드컵 유치 과정도 지켜봤다. 참 열정적인 분이었다. 내가 심장이 좋지 않아 축구를 할 순 없었지만 그때부터 축구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축구회관에 들어간 지 1년쯤 지난 2000년 어느 날 신철순 곰두리축구단 감독(70)이 찾아왔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장애인축구 감독을 하고 있는 신 감독이 송 이사장의 사무실을 찾은 것이다. 축구협회 건물에 축구와 관련이 없는 사무실이 있어 궁금해서 찾았단다. 많은 서예 작품과 수석(壽石)이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곰두리축구단을 말했더니 선뜻 후원자가 됐다. 신 감독은 “송 선생께선 어려울 때마다 작품을 기증하셨다. 15년간 곰두리축구단을 위해 쓴 작품만 수백 점이다”고 전했다. 송 이사장은 대한장애인체육회에도 많은 작품을 기부하고 있다.

“솔직히 곰두리축구단을 처음 보고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에 감사했다. 이렇게 힘들면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곰두리축구단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송 이사장은 ‘기부 천사’다. 어디든 도움이 필요하면 선뜻 재능 기부를 해왔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기부해야 한다. 없는 것을 기부하려고 하면 안 된다. 없는 것을 기부하려면 얼마나 부담이 되겠나.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씩 기부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사회가 밝아지지 않겠나. 난 어려서부터 서예를 했고 그 분야에 재능이 있으니 그 재능을 그저 좀 나누는 것뿐이다.”

지난해 인천 아시아경기 때 대회 조직위에 40점이 넘는 작품을 기부했다. 조직위에서 해외 귀빈에게 선물을 준다며 4점을 원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4명만 주고 다른 분들 안 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냐”며 40점을 더 줘 각국 대표팀에 선물하게 했다.

1999년엔 고려대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관 건립을 할 때 5000점의 작품을 줘 화제를 모았다. 당시 약 200억 원으로 평가됐던 큰 기부였다.

“당시 고려대 정책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서 해외에 살고 있는 고려대 동문들에게 모금을 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해외에 돌아다니려면 힘들 테니 이 작품을 선물하며 기부를 요청해라. 팔아서 현금화해도 된다’라며 김정배 당시 총장께 기증했다”고 말했다. 2000년 9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출범식’ 때 송 이사장 작품 전시회도 열렸다.

송 이사장의 통 큰 기부엔 고려대와 얽힌 남다른 사연도 있었다.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울 때 할아버지 고 송병헌 선생이 쌀 1000석을 기부했다. 전남 고흥에서 서예 등 한학을 공부하던 할아버지가 민족의 후학을 키우겠다는 뜻에 동참했던 것이다.

서예를 배운 것도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어릴 때 서당에서 붓글씨 쓰는 법을 배웠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서예에 집중하라고 하셨단다. 그때부터 6분의 스승에게 글 쓰는 법을 배웠다. 왕희지체와 구양순체 등 중국 고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서체를 개발해 ‘열암체’로 불리는 그의 글은 예술적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서체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유명 사찰과 각종 기업, 방송 드라마 작품명 등 곳곳에서 써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걸린 ‘예도무극(藝道無極)’도 그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정주영 전 회장도 만났다. 축구회관 동판 글씨도 당연히 그가 썼다. 지난해 장애인아시아경기 선수들이 청와대를 방문할 땐 ‘통일대박’을 써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작품을 팔아야 생계가 유지되는 작가였지만 사찰에 써줄 땐 절대 돈을 받지 않았다. 내 작품이 몇백 년 몇천 년간 걸릴 수 있는데…. 내 글이 역사가 될 수 있지 않나. 오히려 내가 영광이다. 내게 사찰 현판을 써달라고 요청한 것에 감사하게 생각했다. 난 서예를 일종의 보시로 생각하고 쓰고 있다.”

송 이사장은 재능 기부를 ‘존재를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다. “남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내 글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내 존재가 의미 있다는 뜻 아닌가”라고 말했다.

축구를 보면서도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는 조만간 열릴 한국축구대표팀의 평가전을 기대하고 있다. 선수들 플레이 하나하나를 지켜보면 가슴이 뛴단다. 27일 우즈베키스탄(대전), 31일 뉴질랜드(서울)와의 평가전 때 태극전사들이 다시 국민들을 감동시키길 바라고 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님이 참 잘하는 것 같다. 투혼은 공정성에서 나온다. 선발 자체의 공정성, 베스트 11 확정의 공정성 등이 보장이 되지 않으면 선수들은 제대로 뛰지 않는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런 점에서 뛰어나다는 게 송 이사장의 판단이다. 그는 그동안 한국 축구에 지연 학연 등이 얽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인간은 자기 눈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냉정한 변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정으로 얽혀 있어 객관성을 발휘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그 문화가 남아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외국인들이 그나마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 같다. 지금까지 슈틸리케 감독이 보여준 모습이 선수들에게 ‘저분은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 같다.”

그는 수학은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만 스포츠는 객관적인 점수화가 어렵다는 게 감독들에게 고민을 안겨 준다고 했다. 훈련과 경기를 보고 선수들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누가 잘하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잘하는 감독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못하면 ‘편애’한다는 등 지연 학연 얘기가 나오는데 이 점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2002년 한일 월드컵), 딕 아드보카트 감독(2006년 독일 월드컵) 등 외국인 감독들이 객관적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글씨도 마찬가지다. 심사나 평가 때 어떤 글씨가 좋은지 선택하기 참 힘들다. 그냥 잘 쓴 글에 점수를 주면 된다. 축구도 마찬가지 아닐까. 잘하는 선수 뽑고 잘하는 선수를 그라운드에 내보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는 칭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선행칭찬운동본부 상임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칭찬이 투혼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받지 못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나. 우리나라는 칭찬에 인색했다. 이젠 ‘격려의 시대’다.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투혼은 용기에서 나온다. 용기와 자신감은 칭찬에서 나온다.”

노서예가는 올해 초 호주에서 국민들을 열광시킨 한국 축구의 자랑인 투혼이 영원히 이어지길 소망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