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존 베이너 미국 연방 하원의장(공화·오하이오)이 아베 총리에게 다음 달 상하원 합동연설 초청장을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20일, 이를 저지하려는 미주 한인 운동을 주도해 온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는 “2007년 (연방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을 본 아베 총리는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코리안 아메리칸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 그래서 졌다’라고 말했다”며 비감한 듯 한탄했다.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치자. 한국은 이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 등 6명의 최고 지도자가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섰지만 일본은 이제 겨우 첫 티켓을 받아 든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더 큰 문제는 미국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시아 과거사 갈등 피로감’이다. 2013년 12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이후 한일 양국 간의 ‘워싱턴 외교전’에서 한국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 왔지만 좀 경박스럽게 말해 이제 ‘약발’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18일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시민참여센터와 워싱턴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가 연 아베 총리 연설 저지 교민단체 집회에는 그 많던 지한파 의원들 가운데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민주·캘리포니아)의 얼굴만 보였다. 12일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관련 세미나에는 일본인 여성 운동가가 일본군 위안소의 추악한 실태를 고발했지만 청중 가운데 미국인은 많지 않았다.
물론 미국인들이 피해국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갈등 자체보다는 ‘갈등 해결’에 더 관심이 많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18일 우드로윌슨센터가 ‘논쟁적인 기억과 화해의 걸림돌’이라는 주제로 연 세미나에서는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 등 4개국 관계자 60여 명이 몰려 6층 회의실이 비좁을 정도였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서울에서 3년 만에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 대해 “큰 돌파구는 없었지만 지역 내 긴장 완화를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속전속결로 이길 수 없다면 지구전(持久戰)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일본과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 설득하고 대외적 명분과 지지를 얻어 나가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진 것이 아니라 새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다.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