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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향한 공공디자인]PID,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입력 | 2015-03-24 03:00:00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




①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뉴 카버 임대아파트 중정(中庭)을 내려다본 모습. 자연 채광과 시선 흐름을 세련되게 고려한 이 공간은 집 없는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집단 주거 시설이다. ②2013년 ‘PID 글로벌 프로젝트’로 선정된 르완다 부타로의 의료인 주거 시설, 건설 과정에 현지 인력과 전통 건축 기술을 폭넓게 활용했다. ③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의 보행자용 표지판 ‘Walk’.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자는 지역 캠페인으로 시작했지만 이 표지판 디자인이 인기를 얻어 미 전역과 캐나다로 확대됐다. 출처 mmaltzan.com·archdaily.com

“‘디자이너의 이익을 도모하는 디자인’을 넘어선 어떤 것.”

미국 하버드대에서 출간하는 격월간 하버드매거진은 3, 4월호에 ‘좋은 디자인: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건축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있다’는 표제의 기획기사를 게재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 건물은 로스앤젤레스 남쪽 신시가지 고속도로 변에 2009년 세워진 ‘뉴 카버(New Carver)’ 임대아파트다.

마이클 말트잔 아키텍츠가 설계한 이 건축물은 집 없는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공동 주거 시설이다. 97가구의 입주자들은 공동 주방, 세탁실, 식당, 정원에 모여 전성기 때 누렸던 사회생활을 다시 영위한다. 응급처치를 위한 의료시설도 갖췄다. 훌륭한 복지시설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특별한 어떤 것’이라 하기엔 과하다.

같은 용도의 아파트가 지금 서울 어딘가에 지어진다면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뉴 카버 아파트의 특별함을 설명한다. 원통 톱니바퀴 형상을 한 이 6층 높이 건물 외벽은 완만하게 굽이치는 고속도로 램프의 곡선과 적절한 리듬으로 호응한다. 뉴욕타임스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에 앉아서 보면 돌아가는 톱니가 차를 끌어당겨 앞으로 죽죽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말트잔은 비벌리힐스의 대저택을 디자인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치밀한 건축적 통찰력을 이 건물에 발휘했다”고 썼다.

원통형 외벽은 또한 밤낮없이 달리는 차량의 소음을 최대한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원통 내부로 들어선 방문객은 벽 안쪽을 휘감아 오르는 계단 중앙에 서게 된다. 수직으로 촘촘히 꽂아 정렬한 높다란 금속 핀이 둥그런 하늘로 시선을 이끈다. 미국건축가협회가 발간하는 ‘아키텍츠 매거진’은 “영세한 거주자를 위한 임대아파트가 ‘도시 경관의 중심 무대에서 감춰야 할 천덕꾸러기’가 아님을 보여 준 데에 이 건물의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뉴 카버를 둘러싼 논의는 건축 분야를 시작으로 1990년대 후반 도입된 PID(Public Interest Design·공익디자인)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설명한다. 보기 좋은 모양새와 적합한 쓰임새를 고려함은 물론, 환경과 경제 등 사회 전반에 지속 가능한 이로움을 더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겠다는 것. 부유층을 위한 사치품 장인에서 사회적 이익의 창조자로 변모하고자 하는 이런 흐름은 독일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가 설립한 미술디자인학교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돌이키게 한다. 그로피우스는 “디자인은 지적 또는 물질적 유희가 아니라, 문명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삶의 일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PID는 저소득층 등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는 SEED(사회경제환경디자인) 등의 커뮤니티 디자인 사회운동으로 확장됐다. 경제력이 강한 소수가 우수한 디자인을 폐쇄적, 차별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끔 조직된 현실을 극복하고 다수에게 좋은 디자인을 누릴 권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디자인 선진국인 핀란드의 공적기금 ‘시트라’는 ‘디자인은 결국 문제 해결 방법’이라는 데 착안해 의료, 인구 고령화, 교육 등 사회 전반의 문제 해결 방안을 ‘디자인하듯’ 제시하고 있다. 뉴 카버 아파트 프로젝트를 추진한 스키드로 부동산신탁의 마이크 알바레즈 이사는 “우리는 이 건물을 통해 디자인이 어떻게 인간의 사회적 갱생을 도울 수 있는지 배웠다. 디자인은 때로 사회 회복을 부르는 구원처럼 작용한다”고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