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의도 불투명한데도 역전 결과에 지지층 반색 시대정신 달랐고 업적에도 큰 격차 핵심 벗어난 죽기 살기 싸움에 저급한 논의 수준 언제나 ‘어른스러운 나라’ 될지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어느 쪽도 진실은 아니다. 2008년 10월 문화재청은 박정희 가옥과 서교동의 최규하 전 대통령 가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현대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박정희 가옥은 등록문화재 지정 6년 반 만에 복원됐으나 역시 서울시가 관리하는 최규하 가옥은 5년 만인 2013년 10월 문을 열었다. 같은 날 지정된 등록문화재가 다른 날짜에 개방된 것은 박원순 시장이 박정희 가옥 복원에 계속 뜸을 들였다는 얘기다. “성급했다”거나 “박정희 마케팅”이라는 평가는 둘 다 맞지 않는다.
화창했던 지난주 말 박정희 가옥을 찾았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 지 30여 분 만에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함께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50대 이상의 나이 든 세대였다. 인근 주민으로 “전부터 집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는 이도 있었고 멀리서 전철을 타고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각의 ‘역사 왜곡’ 주장에 대해 한 문화재 전문가는 “대통령을 두 명씩이나 배출한 집을 보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최근 전현직 대통령 11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앞서는 결과가 나오자 야권과 야권 성향의 누리꾼들이 술렁였다. “드디어 노무현이 박정희를 눌렀다”는 분위기였다. 해당 조사에서 노무현은 32%로 나왔고 박정희는 28%였다. 민심을 반영한 것이라면 의미 있는 변화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 조사에는 중고생을 참여시켰고 박근혜 대통령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5%를 얻었다. 박정희 박근혜 지지층은 겹칠 수 있으므로 처음부터 노무현 쪽에 유리한 방식이었다.
이 조사는 ‘어느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설문을 응답자에게 제시했으나 올해 초 발표된 다른 여론조사에선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대통령은 누구냐’고 물었다. 결과는 박정희라는 응답이 53%를 차지했고 노무현을 꼽은 사람은 18%에 그쳤다. 어떤 설문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조사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은 ‘누구를 좋아 하느냐’고 물어도 박정희 쪽이 앞섰다. 무슨 의도에서 여론조사를 이리저리 비틀어 하는지 궁금하지만 결과적 수치에 연연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각기 속해 있던 시대정신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는 과(過)도 있으나 독보적인 업적으로 이미 평가가 끝난 상태다. 최근 타계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칭송받는 걸 보면 국가 지도자의 첫 번째 평가 기준은 역시 업적이다. 노무현의 장점은 지도자로서 인간적인 면모다. 요즘 대중이 이런 유형의 리더십을 반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 비교가 불가능한 두 명의 대통령을 놓고 어느 쪽이 이겼다고 반색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특정 인물에게 기대어 이득을 챙기려는 정치적 속셈만 번득일 뿐이다.
박정희 가옥이나 대통령 여론조사의 사례에서 새삼 드러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저급한 논의 수준이다. 핵심과 동떨어진 것을 놓고 죽기 살기로 샅바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나라다운 나라’ ‘어른스러운 나라’에 오를 수 있다.